작년 12월 19일, 온 나라를 둘로 쪼개놓을 듯 한국을 뒤흔든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때부터 딱 1년이 지난 바로 그날, 12월 19일에 정치색 짙은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변호인’(양우석 감독, 제작 위더스 필름)이란 영화이다. 개봉도 되기 전부터 이 영화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젊은 시절을 담은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줄거리도 대강 노출되었다. 1980년대 초 부산에서 세무전문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학벌 낮은’ 송우석 변호사가, 어떻게 빨갱이로 내몰린 대학생의 변론를 맡게 되면서 당시 전두환 정권의 용공조작에 맞서 싸운다는 것이다. 명백히 ‘부림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의외로 빨리 만들어진 ‘노무현 대통령의 영화’이고, 예상 못한 시점에 공개되는 ‘대한민국 민주화세력의 기록물’인 셈이다. 그럼, 이 영화는 얼마나 노무현의 길을 걸었고, 얼마나 민주화의 정신을 녹였을까. 그리고 실제로 얼마나 재미있을까.
야학선생 임시완, ‘전환기의 역사인식’을 읽다
서울대, 연고대 출신들이 법조계를 꽉 잡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상고를 나와 판사가 된 송우석(송강호). 하지만 ‘출신의 벽’은 높았을 것이다. 뒤에서 수군대는 이야기를 듣는데 진이 난 그는 판사자리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내려와서 변호사 사무실을 연다. ‘大부산상고’ 출신답게 등기 대행 업무를 시작하며 돈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더니 곧 세무전문변호사로 부산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힌다. 하지만 ‘힘든 시절’ 끼니를 해결했던 돼지국밥집 주인(김영애)의 착한 아들 진우(임시완)의 상황을 알게 되면서 그의 잘 나가던 속물근성 변호사 커리어는 끝이 나고, 영화도 ‘치열한 민주화투쟁’의 법정드라마로 바뀐다.
전두환, 공안, 용공조작, 그리고 부림사건
영화의 배경은 1981년이다. 바로 그 전 해, 전두환이 집권한 것이다. 전두환 식 표현을 빌자면 “나한테 당해보지도 않았으면서...” 공안통치를 시작한다. 그런 공포의 시기에 놀랍게도 1980년 연말 서울대에서는 이른바 ‘무림사건’이 일어난다. 서울대 교내에서 ‘반파쇼 투쟁’이라는 유인물이 발견되면서 실체를 알 수 없는 학생운동권 지하조직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그 결과 많은 서울대 학생들이 잡혀가고/끌려가고 투옥된다. 안개 속 같이 알 수 없는 조직이라는 의미에서 ‘무림(霧林)이라는 시적인 타이틀이 붙은 것은 아이러니이다. 이어서 서울대 ‘학림’사건이 일어났다. 학생들의 조직이라서 ‘학림’(學林)이었단다. 서슬 퍼런 공안정권에서 학생들이 ‘투쟁의 기치’를 든 것이다. 그리고 1981년 마침내 부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터졌다. 영화 ‘변호인’의 모티브가 된 ‘부림(釜林)사건’이다. 영화는 실제 ‘부림사건’의 전모를 그렸다기보다는 당시, 그리고 적어도 노태우 정권까지 이어지는 공안사건의 일반적 패튼을 영화에 녹여내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당시 공안기관은 ‘민주화세력’ 타깃 정하고, 잔챙이를 잡아 족치고 고문하고 옭아매고 조작하고 공범을 끌어들여 자술서를 강요하고는 ‘빨갱이’로 만들어 유죄판결을 내려 “공산주의자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다!”는 성과를 올리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련의 공안플레이에 있어 당시 우리나라 메이저 언론이 일정부분 동참했다는 것도 사실이다.
학생은 어떻게 빨갱이가 되는가
영화 ‘변호인’을 보면 임시완이 도대체 빨갱이라고는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엄마를 위해 밤늦게 국밥집 장사를 돕는 착한 대학생일 뿐이다. 그리고 가난한 여공(女工)들을 위해 야학선생도 마다않는다. 야학을 하는 선생이나 배우려는 여공이나 모두 힘든 일을 끝내고 늦은 밤 모여 향학열에 불타는 존재 아닌가? 하지만 공안검찰이 보자면 이건 ‘공산혁명 학습의 과정’으로 뒤집어씌울 목표물인 것이다. 임시완이 잡혀 들어간 것은 야학 선생을 하며 아무것도 모르는 여공(노동자)들을 붉게 물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여러 대학생들이 모여서 불온서적을 탐독하고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혁명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현 파쇼정권을 타도하고 사회주의혁명을 이루자'는 그런. 재판 과정에서 그들이 읽고 토론한 책들이 나온다. E.H.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와 함께 아마도 80년대~90년대를 캠퍼스 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풀빛, 아침, 돌베개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수많은 사회서적 제목을 만나보는 감회를 느낄 것이다. 그런 책을 읽었다는 것이, 그리고 스터디그룹을 하며 읽은 책을 갖고 토론회를 펼쳤다면, 전두환 시각에서 보자면 “사회질서를 붕괴시키고 자유 대한민국을 파멸로 이끌 반국가단체 구성원”임에 분명한 것이다.
불꽃 튀는 법정드라마
이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가 명확히 갈린다. 전반부는 우리가 아는 ‘그 분’이 ‘노가다’를 하면서 주경야독하여 변호사가 될 때까지의 인간극장이다. 그것도 꽤나 정이 가는 성공스토리를 보여준다. 마치 졸부의 성공담처럼. ‘비주류 촌놈’이 멸시와 냉대를 뚫고 성공한 다음의 이야기는 보통 졸부 스토리로 연결된다. 돈과 성공이 최우선인 속물근성. 아마도, 어쩌면 정말로 ‘그 분’은 그러했는지 모른다. 자신의 얄팍한 성공을 과시하기 위해서, 아내의 고생을 단 번에 날려주기 위해서 전망 좋은 아파트 로열층을 갖기 위해 ‘돈질’하는 장면과 성공한 이후에도 마치 ‘와신상담’의 주인공처럼 여전히 돼지국밥에 몰입하는 인물이니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요트까지 등장한다. 호화요트논란과 올림픽 금메달까지 감독은 능수능란 ‘노무현 족적’을 영화에 심어놓는다.
여하튼 후반부는 불꽃 튀는 법정 공방전으로 넘어간다. 영화에서는 모두 5번의 공판이 등장한다. 시나리오를 직접 쓴 송우석 감독은 굉장히 공을 들여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물론, 진우(임시완)와 10여 명의 피고인(부림사건은 모두 16명이 재판을 받았다)들은 이미 지독한 고문으로 공안검찰의 입맛에 맞춘 ‘자술서’를 쓴 상태이다. 영화에서 공안통이 송변에게 말한다. “자네 국보법(국가보안법)사건은 처음인 모양인데.. 국보법 사건의 본질은 유무죄가 아니라 형량이야.”라고 말한다. 이미 빨갱이인 것은 정해진 결론이고 어떻게 고분고분 재판을 끝내 형량을 경감 받도록 하는 것이 변호사의 임무라는 것이다. 고문 받았다고 떠들어봤자 증거도, 증인도 없으니 말이다.
첫 번째 공판에서 (이미 서울에서 혁혁한 실력을 보였다는) 공안검사(조민기)는 임시완이 직접 썼다는 자술서를 읽어준다. “월남은 패망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체제로 통일된 것이다. 우리 남한도 그러한 길을 밟아야한다. 작금의 목표는 파쇼정권 타도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한반도 전체의 사회주의혁명을 통한 민족해방에 있다.” 송변은 당연히 그 증거자료를 부정한다. “강요와 폭행에 의해 작성된.....” 물론, 재판장(송영창)에 의해 제지당한다. “기냐 아니냐로만 대답해.”라고 윽박지르며.
두 번째 공판에서는 더 재미있는 광경을 목격한다. 당시 시국사건 재판에서는 검찰 측 증인으로 모 기관에서 나온 전문가라는 사람이 ‘서적’에 대한 불온성을 검토한다. 영화에서는 배우 박수영이 연기하는 ‘내외정책연구소 소속 수석연구관’이다. 1980년대 초반의 공안사건을 그랬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무척이나 우스꽝스럽게 그려진다. 공안검사가 핏대를 올리며 대학생 진우(임시완)가 읽은 책의 불온성에 대해 ‘전문가 소견’을 강조한다. “이 책은 공산주의자이자 역사가인 E.H.카가 저술한 책으로 일반학생, 노동자들에게 공산주의 혁명과 체제를 옹호하는 위험한 책이다. 이 책을 소장,학습하는 자는 공산주의 혁명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판단이 가능하다.”고.
아마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아니 그가 누군지 그 책이 무엇인지도 몰라도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라는 말의 출처임은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을 읽었다고 빨갱이? 송변의 눈부신 입담, 변론술이 여기서 펼쳐진다. 내외정책연구소의 정책부터 까발리면서.
당신이 그때를 알아?
그리고 이 영화에서 역대급 악역연기를 펼치는 고문경감 차동영(곽도원)과의 대질심문 장면이 펼쳐진다. 뼈에 사무친 반공주의자 차동영과 국보법 논쟁을 펼치는 송변. 그 유명한 대사가 여기서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송강호의 두 눈에는 핏발이 서고 목소리엔 울분이 넘쳐난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 장면에서 펼치는 송강호의 너무나 선정적인, 선동적인 연기에 반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그 장면은 고스란히 ‘국회의원’ 노무현이 전두환 노태우를 불러놓고 펼쳤던 5공 청문회 때의 명패투척사건을 떠올릴지 모른다.
양우석 감독은 탄탄한 법정드라마를 만들었다. ‘빼도 박도 못할’ 고문현장의 증인의 등장. 반전, 그리고 또 반전! 이 순간은 잭 니콜슨을 침몰시키는 ‘어 풋 굿맨’의 그 장면과 겹쳐질 정도이다.
노무현, 김광일, 그리고 대한민국
물론, ‘변호인’은 대통령 노무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임시완이 무죄로 풀려나는 것을 보는 민주화승리 이야기가 아니다. 공안검찰, 고문경찰이 정의의 심판을 받는다는 사필귀정 스토리가 아니다.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있었던 '야수의 시대'를 재구성한 영화이다.
이 영화에서 부산으로 낙향한 별 볼일 없을 것 같은 송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는 유일한 법조계인물로 김상필 변호사가 등장한다. 정원중이 연기한다. 처음엔 문재인 의원이 모델인 줄 알았는데 보아하니 ‘김광일’이 모델인 것 같다. 위에서 언급했던 1989년 12월 31일 열렸던 5공 청문회(‘5공비리특위-광주특위 연석청문회)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노무현과 함께 맹활약한 김광일 의원이다.
당시 김광일 변호사는 부산에서 민주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떨치던 인물이었고 당연히 부림사건 때 변호인단을 구성한 주요인물이었다. 영화 마지막에 보여주는 법정 씬은 1987년에 일어난 일이다.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 장례식 건으로 노무현 변호사가 구속적부심을 펼치는 장면이다. 당시 부산지방변호사회 소속 변호사 99명이 무료 변론을 자청하여 선임계를 냈다. 물론 김광일도, 문재인도 포함된다. 이날 재판상에게 “출석한 변호인의 수가 너무 많다. 확인 바란다.”고 한 인물이 바로 김광일 변호사였다. 이후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었고 김광일은 나중에 YS대통령 비서실장이 된다. 지금은 두 분 다 고인이 되었다. 그때의 많은 사람들이 민주의 씨앗을 뿌렸기에 그리고 많은 인권변호사가 존재했기에, 지금 이만큼 국민들이 향유할 수 있는 '민주라는 것'의 정도가 크고, 두텁고, 탄탄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아마 그 장면이 아닐까. 끌려가서 수십 일 동안 고문을 당한 대학생들이 겁에 질러 자술서를 쓰면서 “그때 우리 버스를 타고 어디어디에서 내려.. 그때 우동을 먹었었지. 그 우동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어....” 영화에서 배우가 훌쩍거리고 객석에서 흐느끼기 시작한다.
‘변호인’이 단순한 노무현신격화 영화라면 그것은 그 당시를 살았던 많은 민주인사들을 모욕하는 것이리라. 대한민국은 누구 한 사람의 희생과 열정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란 사실을 기억해야할 듯. 송강호는 내년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싹쓸이할 것 같다. (박재환, 201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