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내년 3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한국대표로 선정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베니스와 토론토를 거쳐 국내 관객에게 처음 공개된 이 작품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엑스>를 한국적 맥락으로 치밀하게 옮겨놓은 잔혹하고도 코믹한 재취업 프로젝트다.
소설 <엑스>는 갑작스러운 해직 통보를 받은 중간관리자가 재기를 위해 자신과 같은 분야의 경쟁자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제지회사 경력직을 꿈꾸는 이병헌은 단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이력서를 보낸 잠재적 경쟁자들을 찾아 나선다. 박찬욱 감독은 이 비정한 서사를 특유의 그로테스크한 영상미 대신 '코믹한' 상황과 가족 드라마의 변주로 풀어낸다.
원작의 설정은 한국적 상황에 맞춰 유려하게 현지화되었다. 2차대전 당시의 노획 권총은 베트남전에서 가져온 '북한제 권총'으로 바뀌며 미스터리한 긴장감을 더한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 등 쟁쟁한 배우들이 주인공의 레이더망에 걸려드는 처치 대상으로 등장해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가족 이야기의 강화는 이 영화의 핵심이다. 넷플릭스 구독조차 끊어야 할 처지에 놓인 중산층 가계의 곤궁함 속에서, 자폐적이던 딸은 마지막에 이르러 완벽한 첼로 연주를 선보이며 가족 공모극의 정점을 찍는다. AI와 자동화 로봇이 점령해 인간의 노동력이 불필요해진 제지공장의 풍경은 박 감독이 바라보는 서늘한 미래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로 얼룩진 과정을 거쳐 얻어낸 주인공의 가정은 기묘하게 평온하다. 마당엔 사과나무가 자라고 자식들은 안정을 되찾는다. "어쩔 수가 없었다"는 변명 뒤에 숨겨진 가장의 뿌듯함과 비밀스러운 행복은 박찬욱 감독이 던지는 뒤틀린 위로이자 날카로운 풍자다. (박재환영화리뷰.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