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수가없다
내년 3월 열리는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한국대표로 선정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가 17일 열린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되었다. 베니스영화제와 토론로영화제를 거친 뒤 한국관객에게 처음 선보이는 자리였다. <어쩔수가없다>는 미국 작가 도널드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엑스>를 한국 배경으로 옮겨놓은 작품이다. ‘해고된 직장인의 애달픈 재취업 프로젝트’가 박찬욱의 손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 지켜보는 것도 이 영화 감상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박찬욱 감독이 <엑스>를 영화로 만든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궁금했다. <공동경비구역JSA>에서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에게는 <복수는 나의 것>과 <친절한 금자씨> 같은 작품이 있었고, 훨씬 이전에는 <달은 해가 꾸는 꿈>과 <3인조>의 늪이 있었으니 말이다. 소설 <엑스>는 합병과 공장자동화로 갑작스레 해고통보를 받은 중간관리자가 재기하려고 몸부림 치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곧 재취업할 줄 알았지만 미국 경제가, 산업의 트랜드가 바뀌었다. 주인공은 어쩔 수 없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했다. 배운 게 제지기술뿐이고, 이력서 보내는 데가 제지회사 뿐인 그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제지회사 경력자’를 뽑는 제지회사 지원자의 이력서가 그 길이다. 찾아가서 그를 죽이면 된다. 비슷한 경력, 혹은 좀 더 나은 사람을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얼추 네 댓 명만 처리하면 될 것 같다. 과연 그의 계획은 성공할까.
박찬욱 감독은 <엑스>를 읽는 순간 몇몇 상황이 ‘환등기’처럼 펼쳐졌을 것 같다. 컨베이어 벨트에 돌아가는 커다란 펄프 뭉치, 안전모를 쓴 노동자들이 모습. 복수에 나선 해고자는 공장장을 믹스기에 갈아 넣거나, 살이 피둥피둥 찐 경영진을 잉크에 담가버릴지 모른다. 하얀 종이에는 빨간 피가 그로테스크하게 번질 것 같다. 그런데 박 감독은 그런 영상보다는 ‘코믹한’ 상황을 내세운다. 이병헌은 이제 25년 매달린 공장에서 해고된 뒤 자기의 경쟁력을 돌이켜볼 것이고, 사회안전망의 부실함을 실감하고, 어쩔 수 없이 위험한 사냥에 나서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 때문에 등한시한 가족과의 관계도 재정립할 수 있을지 모른다. 콧수염 기른 이병헌은 박 감독의 지휘아래 이제 왈츠를 춘다. (왈츠가 아니어도 된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쩔수가없다
소설이 영화로 되면서 몇 가지 변화가 생긴다. 2차대전 참전용사였던 아버지가 독일군에게서 노획한 권총은, 베트남전 때 가져온 아버지의 권총으로 바뀐다. 그런데 그 총은 ’북한제 권총‘이다. (그게 이 영화의 가장 미스터리한 지점이다. ’동조자‘의 영향인가?)
원안도 있고, 권총도 있으니 감독은 이제 처치할 대상만 정하면 된다. 박희순, 이성민, 차승원이 레이더망에 걸려든다. 그들은 적절한 현지화 방식으로 운명이 바뀐다. 가족이야기도 적절히 변주된다. 우아하게 여러 잡지를 구독하던 중산층 가계는 이제 넷플릭스 구독을 끊어야할 처지가 된다. 아들이 훔치는 아이템도 달라진다. 아들이 훔친 ‘갤럭시’는 박스째로 땅에 묻히고, 그 곳에는 놀랍게도 ‘사과’나무가 심어진다.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이야기지만 가족이야기는 강화된다. 특히 딸의 존재감이 커진다. 영화는 결국 ‘언젠가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가족공모극이다. 처음 자폐적인 모습을 보이던 딸은 마지막에 가서는 완벽하게 첼로를 연주한다. 아버지의 공장은 이제 자동화 로봇이 돌아다니고, AI가 공장의 모든 조명을 끈다. 사람이 없으니 불도 필요 없는 것이다. 그 큰 공장에는 이제 한 사람의 노동자만 있으면 된다. 박 감독은 제지공장의 미래, 인간노동력의 한계를 이렇게 그린다.
하지만 그 노동자의 집은 행복하다. 마당엔 사과나무가 자라고, 커다란 개도 두 마리나 키울 수 있고, 자식들도 이젠 말썽을 안 부린다. 아내도 행복하고. 그럼 됐지 뭐. 가장인 이병헌은 뿌듯하고, 감독 박찬욱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비밀만 유지된다면. 어쩔 수가 없었으니깐. (부산/박재환)
▶어쩔수가없다 (영제:No Other Choice) ▶감독: 박찬욱 ▶각본:박찬욱, 이경미, Don McKellar, 이자혜 ▶원작: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액스’ ▶출연: 이병헌 (유만수), 손예진(이미리), 박희순(최선출), 이성민(구범모), 염혜란(이아라), 차승원(고시조) ▶제작:모호필름 / CJ ENM 스튜디오스 ▶공동제작: KG PRODUCTIONS ▶제공배급:CJ ENM ▶제작: 박찬욱, 백지선 ▶공동제작: Michèle Ray Gavras, Alexandre Gavras ▶개봉:2025년 9월 24일/ 15세이상관람가/ 138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