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워낙 초광속으로,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한국사회다보니 1997년의 국가적 비상사태를 제대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그해 연말 우리나라는 ‘IMF사태’를 맞았다. 제대로 말하자면 ‘흥청망청, 우왕좌왕, 오리무중’의 상태에서 외환위기를 맞았고, IMF(국제통화기금)의 구제금리를 받아들이며 체질개선을 위한 ‘펀더멘털’ 구조조정에 나서야했다. 그때 나락에 떨어졌던 많은 사람들이 자살에 내몰렸다. 그리고, 일부는 한국 땅을 떠나기도 했다. 살기위해, 재기하기 위해. 그 중에 국희네 가족도 있었다. 지난 31일 개봉한 김성제 감독의 영화 <보고타>이다. 그들은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로 향한다.
19살 국희(송중기)는 IMF 직격탄을 맞아 도산한 아버지(김종수)와 함께 한국을 떠나 보고타에 도착한다. 공항에서부터 엉망진창의 현실을 보며 아버지는 “우린 미국으로 갈 거야. 여긴 그냥 지나가는 톨게이트일 뿐이야”라고 말한다. 그런 큰소리치는 아버지가 기댈 곳은 오래 전 월남전 전우였던 박병장(권해효)뿐이었다. 오래전 이곳에 흘러와서 입지를 다진 인물이다. 한국의 동대문시장에서 란제리를 밀수입해서 터전을 잡았다. 국희는 그런 박병장 밑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삶의 방식을 배운다. 부패한 나라에서, 혼란스러운 시장에서, 이상한 연으로 이어진 한국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돈을 벌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법을 배워나간다. 물론, 믿음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과 배신을 해야 하는 타이밍, 그리고, 뒤통수에서 살아남는 법까지. 여기는 커피와 마르케스의 나라 콜롬비아니까.
영화는 ‘IMF 대한민국’의 비극성을 극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거나, 짐작할 만한 현실이 국희 가족에게 닥쳤으리라. 그래서 야반도주하듯 한국을 떴을 것이고, 그 어떤 사연으로 아빠만큼 엄마(김호정)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그런 ‘한국의 그림자’ 대신 ‘콜롬비아 보고타’의 어두운 현실을 시작부터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공항에서의 시위와 폭력, 경찰과 총이 갓 도착한 한국인에게 이곳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위험한 곳인지 보여준다. 곧바로 택시 강도까지 더하면서 ‘엘도라도의 꿈’은 악몽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그런 보고타는 점점 ‘희망의 땅’이 되어간다. ‘마지막 희망의 땅’으로. 그 땅에도 동포가 있고, 동포가 있으니 당연히 도움의 손길이 있고, 그에 걸맞은 암투와 질투, 파벌의 싸움이 벌어진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땅에서 그들은 마약 대신 란제리와 오리털 파커를 둘러싼 전쟁을 펼치는 것이다.
드라마 <재벌집 막내아들>에서 순양 가문의 해결사였던 송중기는 이곳에서 새파란 이민자에서 불굴의 타이쿤이 되어 가는 과정을 역대급 연기로 펼친다. 너무나 곱상한 이미지가 오히려 캐릭터의 진정성에 태클을 걸 정도이지만 말이다. 대신 베테랑 조연들의 현실적인 생존기로 보고타 이민개척사를 탄탄하게 메꾼다.
이 영화의 기저에는 대우 김우중 회장의 프런티어 정신이 녹아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당시(무역)상사맨의 모토였고, 대한민국 청년의 시대정신이었을 것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땅에서 마약 대신, 란제리를 선택한 것은 탁월한 상인 감각이었을 것이다. 오리털 파커의 역발상까지. 이들은 그것을 기반으로 시장을 형성하고, K-프로덕션의 영향력을 키워나갔다. ‘코리안 드림’이 무너지고, ‘아메리카 드림’은 입구 컷 당한 뒤 ‘엘도라도의 꿈’을 꾸는 그들은 (넷플릭스) ‘수리남’의 악당과는 또 다른 한인들이다.
의외로 짧은 런닝타임의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에서 ‘1997년의 한국, 한국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곁가지는 쳐내고, 국희의 흥망성(쇠)로 직진하는 방식이 괜찮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쉬운 것이 있다면 송중기의 얼굴이 너무 곱다는 것이다. 조금 더 ‘보고타’의 뜨거운 맛을 본 얼굴이었다면 절박한 스토리에 더 빠져들 수도 있었을 것 같다. 알 파치노의 <스카페이스>처럼.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 (영제:Bogota: City of the Lost) ▶감독:김성제 ▶각본:황성구,김성제 ▶출연:송중기(국희) 이희준(수영) 권해효(박병장) 박지환(작은 박사장) 조현철(재웅) 김종수(근태) 김호정(국희 엄마) 임성재▶▶제작사:(주)영화사 수박, (주)이디오플랜 ▶배급사:플러스엠 ▶2024년 29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스페셜 프리미어 ▶개봉:2024 12월31일/15세이상관람가/107분
[사진=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