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에 이은 봉준호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다. 봉준호 감독은 상상력이 넘쳐나던 학생시절, 아파트에서 내다보이는 한강을 가로지르는 많은 다리 중의 하나인 잠실대교를 바라보며 별 생각을 다해 보았단다. 그중에는 ‘에일리언’에 나옴직한 괴물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상상도 했었단다. 그리고, 감독이 되어 그 상상을 형상화시킨다. 한강다리 어느 교각 밑에는 ‘에일리언’ 같은 괴물이 살고 있다고. 그것은 할리우드가 상상한 외계에서의 온 괴생물체가 아니다. 어디서, 어떻게 나왔을까. 오늘밤 11시 25분, KBS 2TV에서 ‘아카데미시상식을 앞두고’ 특선영화로 <괴물>을 방송한다.
햇살 가득한 한강 둔치. 변희봉 네 가족은 이곳에서 생업으로 매점을 운영 중이다. 큰 아들 강두(송강호)는 매점 안에서 자거나, 손님에게 구워줄 오징어 다리 하나를 떼먹는다. 중학생 딸 현서(고아성)가 구닥다리 핸드폰에 짜증내는 것도 일상인 듯. 현서의 삼촌(박해일)은 무엇이 불만인지 대낮부터 술이고, 고모(배두나)는 양궁 경기에서 오늘도 결정적인 순간에 활시위(스트링) 놓는 것을 주저한다. 적어도 변희봉 네 가족의 한강매점은 너무나 평범하다. 그런데, 한강에서 괴물이 등장한다. 사람들을 물고는 정신없이 원효대교 교각 사이로 사라진다. 현서도 괴물에게 물려간다. 이제 남은 가족들이 현서를 찾아 괴물과의 사투를 펼치기 시작한다.
천만관객을 돌파한 <괴물>은 ‘반미’(反美)영화라는 평가도 받았다. 물론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미군 용산기지에서의 독극물 한강 무단방류에서 그런 소리는 들을 만하다. 굳이 봉 감독을 사회파감독이라고 한다면 그의 모든 작품은 의미심장할 것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의 대학교수들의 계급사회를 시작으로 <기생충>에서의 사회적 계급론까지. (물론, 단편 <지리멸렬>의 풍자는 더할 나위가 없다) 미군의 환경범죄는 2000년 실제 발생했던 맥파랜드(Albert McFarland) 사건을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런데 봉 감독은 사회파 반미감독이라기보다는 상상력 풍부한 작가주의 감독이다.
오래전 <엘리게이터>라는 미국영화가 있었다. 거대제약사에서 신약을 개발하는데 동네 개들이 자꾸 사라진다. 그 개들이 임상대상으로 쓰였고, 실험 중 폐사한 개들은 하수구로 그냥 버려진다. 그런데, 애완‘새끼’엘리게이터가 한 마리 버려져서 하수구에서 살게 되고, 그 놈은 실험용 개의 사체를 먹고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엘리게이터가 되어 미국인들이 평화롭게 사는 주택가를 어기적어기적 돌아다니게 된다. 아마도 (인과관계는 전혀 없겠지만) 미군이 내다버린 포름알데히르를 꿀꺽꿀꺽 마신 올챙이가 ‘괴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봉 감독은 설명을 안 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그랬다. ‘죠스’에 쫓기다보면, 상어 아가리가 왜 저리 커? 라고 신경 쓰는 관객은 없을 것이라고 했으니.)
봉 감독은 평화로운 소시민(식민지/하층계급)의 소심한 삶의 영역에 우주적 괴물과 제국주의적 무기(에이전트 옐로우 같은)로 치장한, 그리고 부적당한 봉쇄와 어설픈 제어장치로 진실에 대한 접근을 가로막는 무능한 행정당국의 결합으로 영화를 ‘봉쇄와 탈출’의 구도로 이끈다.
봉 감독은 영화 곳곳에 풍자와 해학을 숨기지 않는다. 합동분향소에서 보여주는 유족들의 울부짖음과 유니폼을 입은 관료들의 등장, 사회적 혼란 속에서 돈을 밝히는 족속들, 펜데믹의 공포와 미군에 대한 음모론을 뒤섞는다. 봉 감독은 국가의 도움도, 국제적인 지원도 없이 오직 ‘하찮은, 시원찮은, 변변찮은’ 가족의 힘만으로 현서를 찾아, 미로를 헤매고 문제를 해결해 나간다.
실제 <괴물>에서 가장 감동적인 것은 강두가 바닥에 쓰러진 남자아이- 단지 현서와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를 일으켜 안는 장면이다. 한강이 오염되었든 말든, 피붙이이든 말든, 이 땅의 민초들은 그 공기를 마시고, 그 물을 마시며, 그 오징어 다리를 오늘도 질겅거리며 씹을 테니 말이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게 아니라, 괴물의 심정으로 제국주의의 재미를 맞춘 셈이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