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임진왜란이라 부르는 전쟁은 1592년 임진년에 시작된 전쟁이다. 그해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일본은 바다를 건너 부산에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북진한다. 왜(倭)는 전쟁 초입에 ‘길을 열어 달라’(征明嚮導/假途入明)고 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조선을 밟고 중국(명)을 정복하려는 야망에 불탔다. 여기서 잠깐, 전쟁의 불씨는 거란 땅에 잠시 튀었을 뿐 명나라까지 백척간두의 위기를 안겨준 적도 없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적도 없다. 억울하게 밟히고, 깨지고, 죽어나간 것은 조선이고, 조선의 백성이었다. 7년간 이어진 그 전쟁의 한복판에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을 앞세워 ‘명량’, ‘한산’에 이어 ‘노량’에서 일본과 싸운다. 오늘도 노량의 물결은 높고, 바닷바람은 차가울 것이다.
7년을 이어온 전쟁은 이미 지지부진하였다. 왜군은 기세 좋게 올라갔다가 쫓기다시피 내려와 남쪽에 성을 높이 쌓고 주저앉았다. 그때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갑자기 숨을 거두며 철군을 명령한다. 명과 조선은 왜군을 충분히 남으로 밀어냈고, 그 왜군은 도망갈 바다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바닷길을 막아선 인물이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왜 퇴로를 막고, 전쟁이 이어지기를 바랄까. 명의 황제도, 조선의 왕도, 끈 떨어진 왜장들이 다 원했는데 말이다. 김한민 감독의 <노량>은 바로 그 지점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해도를 앞에 둔 이순신의 복잡한 심사가 펼쳐지는 것이다. 이미 명과 왜는 이렇게 저렇게 ‘내통’하여 ‘평화’를 ‘획책’한다. 조선의 왕은 발언권도 외교력도 없다. 조선의 왕과 그 곁의 많은 신하들은 적들이 빨리 물려나기를 원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생각은 달랐다. 저 왜놈에게 교훈을 안기지 않는다면 전쟁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역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왜 조선을 밟고 명을 치려고 했을까. 위키피디아 일본어페이지에는 전쟁의 동기/명분에 대해 무려 10가지 이상의 설(說)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경제/종교/동아시아적 관점 등 그럴싸한 ‘전쟁의 이유’가 제시된다. 그만큼 전쟁의 원인은 많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이 우발적이며, 또한 필연적인 것이다.
명은 가련한 조선(선조)의 왕을 위해 천병(天兵)을 출전시킨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조선의 백성들이 겪어야할 고통은 엄청났다. 어쩌면 아침엔 왜군에게 도륙되고, 점심엔 조선군에 빼앗기고, 저녁에 명군이 쓸어갈 것이다. <노량>에서는 진린의 막사에서 이뤄진 왜와의 교섭(혹은 물밑거래)을 엿볼 수 있다. 필요한 것은 ‘수급’(首級)이요, 조속한 종전이니 말이다. 이재운의 역사소설 <이순신>에는 명나라 군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 대목도 있다. “왜군은 얼레빗이요, 명군은 참빗이다. 얼레빗은 빗살의 틈이 엉성하고 참빗은 빗살이 촘촘하다.” 그만큼 명 구원군의 행패가 심하다는 것이다. (물론, 명군이 당시의 관점에서는 꽤 규율이 잘 된 파병군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여하튼 전쟁은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고, 생명을 앗아간다. 왕은 왕궁을 잃고 위신이 손상되었을 뿐이겠지만.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도 이순신이 진린과 '수급'을 두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진린의 태도에 분노에 차오른 이순신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한다. "...이자를 여기서 베어야 하나. 허리에 찬 칼이 천 근의 무게로 늘어졌다...." 이순신이 그랬다면 조선의 사직은 끝장이 났을 것이고, 전쟁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이 순간은 후대의 '대체역사' 소설가, 판타지 작가의 과제로 남겨둔다.
영화 <노량>은 적어도 조선과 명, 일본의 사정을 잘 알려준다. 관점에 따라선 (이재운 소설에서처럼) 명군을 잔인한 접수군으로 만들 수 있고, 왜군은 훈도시의 야만인으로도 묘사할 수 있다. 김한민 감독은 그런 1차원적인 전쟁이 아니라, 간략하게나마 동아시아의 정치외교지형도를 펼친다. 이순신이 죽기를 각오하고 해전을 펼칠 때, 치열한 외교전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점에 조선의 왕은 형편없는 교시나 내리고, 이순신은 안타깝게도 끝내야할 전쟁을 향해 북소리만 울릴 뿐이다.
물론, 임진왜란이 끝난 뒤 얼마 뒤 명은 망하고 만주의 여진족, 청이 들어선다. 일본은 내전을 거듭하며 국력을 키워나간다. 조선왕조는 오랫동안 지속된다. 일본이 다시 안 쳐들어오고, 중국은 대국(大國)질을 그만 뒀을까. 이순신이 왜 그리 전쟁에 매달렸는지 이해가 간다.
잠시 찾아보니 전쟁과 관련된 명언은 많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말했다. 이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점과 일치할 것이다. 플라톤이 했다는 “죽은 자만이 전쟁의 끝을 본다.” 이건 그때 차가운 바닷물에 빠져 죽고, ‘수급’신세가 된 병사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전시에 겪을 백성의 고통이기도 하다.
<명량>과 <한산>을 거치며 남해 바다를 손바닥 보듯 꿰뚫고 있는 김한민 감독은 ‘노량’에서 그 ‘해전’(海戰)의 정점을 보여준다. 조선 배와 명나라 배, 왜선 수백 척이 뒤엉켜, 하룻밤 꼬박 생사의 전투를 치른 이순신. 이미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이순신은 포 소리와 총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질 것이다. 조선의 창에 왜군이 쓰러지고, 쓰러지는 왜군의 조총에 명군이 죽는다. 죽어가는 명군이 휘두른 칼날에 또 누군가가 쓰러진다. 이순신이 그 순간 본 환영들, 둥둥 울리는 북소리 속에 삶과 죽음이 교차한다. 지금 살아남았지만 다음엔 자신이 바다에 빠져죽을 것이다. 이순신은 끝없이 북을 울린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19일) 새벽까지 이어진 참혹한 전쟁이었다. 이긴 싸움도, 진 싸움도 아니다. 계속될 싸움이 남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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