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것은 1936년 독일 베를린 올림픽 때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한껏 게르만 민족의 우월함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해 ‘우쭈주’하던 시절이었다. 손기정은 올림픽 금메달을 땄지만 그의 조국은 ‘일본’이었고, 그의 국기는 ‘일장기’였으면, 시상대에 오를 때 울려 퍼진 국가는 ‘기미가요’였다. 손기정 선수는 좌절하고, 분노가 치밀었고, 억울하고, 원통했을 것이다. 그리고 해방이 되었지만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다. 바로 그 시점의 우리나라 스포츠 사(史)이다. 외세에 맞서 오랫동안 독립운동을 펼쳤지만 국제적으로 ‘대한민국’이 공인되기 전까지, 그러니까 국제적으로는 ‘남은 미국이, 북은 소련이’ 군정을 펼칠 때의 이야기이다.
손기정 선수는 해방된 한국에서 여전히 술에 취해, 빼앗긴 금메달의 영광, 조국의 비애를 곱씹고 있다. 그 시절 서윤복이란 청년은 서울 냉면집 배달부로 태평로를 달리고 있었다. 그리고 베를린에서 손기정에 이어 (그리고 영국의 하퍼에 이어) 동메달을 땄었던 남승룡은 손기정에게 다시 달리기의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조국의 영광을 빛낼 새로운 건각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기회는 왔다. 베를린에서 손기정의 운동화를 건네받았던 미국의 조니 켈리(18등을 했었다)가 미국 보스턴 마라톤대회에서 우승하며 손기정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이제 ‘일본의 일장기’가 아니라 ‘당당한 조국의 태극기’를 달고 국제대회에 참가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그런데 당시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나라’만 없는 것이 아니라 국적기도, 미국 직항노선도 없던 때이다. 그래서 손기정과 남승룡, 서윤복은 미군용기를 타고 일본으로 가고, 괌으로 가고, 하와이를 거쳐 미국 땅에 도착한다. 이제 태극기와 성조기 중 어떤 국기를 달고 뛰어야하는지 선택해야한다.
영화 <1947 보스턴>은 오랫동안 ‘헝그리 스포츠’의 대표종목인 마라톤의 위대한과 인간승리에 초점을 맞춘다. 손기정이 달렸던 이유와 서윤복이 달리는 이유는 다르다. 적어도 처음에는 말이다. 서윤복은 찢어지게 가난한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운동화를 신고 트랙을 돈다. 손기정은 그런 선수에게서 명분과 이상을 찾고, 결국은 피 끓는 애국애족의 태극기를 흔들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스포츠 영화의 그런 미덕을 다 담고 있으면서 당시 우리나라가 처한 국제적 위상을 실감하게 한다. ‘나라’가 없으니 외교부도, 체육부도 없다. 국제적으로 미 군정 치하인 셈이다. 물론 이 영화는 ‘남과 북의 정치협상’이 핵심이 아니다. 미군정 책임자 하지 중장과 스메들리 체육과장의 중재와 노력으로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1947년의 '한국'의 국제적 현실과 함께 지금은 상전벽해가 된 서울이 옛 모습을 보여준다. 전차가 다니고 초가집이 있고,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 시위가 벌어지고 있으며, ‘왜놈이 물러간 자리를 채운 코쟁이’의 드잡이를 보여준다. 그리고 매판자본의 어두운 그림자를 송영창의 요정 신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은 역시 ‘국민적 영웅’. 손기정의 금메달이 광채를 잃어갈 때 새로운 스타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쉬리]와 [태극기 휘날리며]로 한국영화의 사이즈를 키운 강제규 감독은 [마이웨이]와 [민우씨 오는 날]을 통해 한국역사의 고난과 한국인의 고통을 꾸준히 스크린에 재현시키고 있다. 이번에는 내놓은 신작은 온 국민이 아는 손기정과 함께, 서윤복이라는 마라토너를 소환시킨다. 영화를 본 관객은 해방정국의 그 어수선한 시절에 그렇게 뛰고, 달리고, 땀 흘린 선수가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궁금해질 것이다.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영화적 구현인지에 대해. 특히나 미 군정측의 미온적(?)인 행정 처리와 함께 온 국민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그들의 장도를 돕는 아름다운 모습이 등장한다. 그런데,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기사가 있다.
....보스턴대회 초청을 받았으나 재정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 미국으로 갈 여비와 체재비가 없어 미 군정청의 비자가 나오지 않는 딱한 사정에 이른 것이다. 이에 체육기자회와 각계 대표가 모여 국민들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마침 보스턴에 살고 있던 백남용씨가 숙식을 책임지겠다는 재정보증을 해왔으며 미군정 체육관 스메들리 여사가 나서서 모금운동을 했다. 스메들리 여사는 월급을 절약해 모은 600달러를 롯지 군정장관에게 맡기면서 한국선수의 지원을 간청했고 롯지 장관은 주한미군 장교들로부터 1인당 1달러씩 걷어 1천500달러를 마련해주었다. 스메들리 여사는 모자라는 경비를 보충해주기 위해 언더우드 박사를 찾아가 1천달러를 추가로 지원 받고 군용기까지 주선해 줘 서윤복은 손기정, 남승룡 두선배와 같이 출국할 수 있었다....
어쨌든 손기정, 남승룡, 서윤복은 온갖 시련과 고난, 장애를 극복하고 미국으로 갔고, 달렸고, 승리한 것이다. 강제규 감독은 난관 속에서도 굳은 의지로 일어서는, 뭉치는 민족 근성을 이 영화에 담고 싶어 한 모양이다. 세 명의 위대한 마라토너의 스포츠 정신을 오늘날 이어받기를.
그런데, 이런 기사도 있다. 이승만 박사가 서윤복을 만난 자리에서 했다는 농담. “나는 평생 독립운동을 해도 신문에 한 줄 나지 않았는데, 그대는 겨우 2시간 25분을 뛰고 연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구만”이라고. 그들은 한평생 달렸는데, 108분 영화로 그들의 땀과 그들을 응원한 국민의 마음을 다 담을 순 없을 것이다. 2023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합니다~~
참, 제목으로 쓰인 '보스톤'은 지금 외래어표기법에 따르면 '보스턴'이 된다. 제목만큼은 확실히 올드하다!
▶1947 보스톤 ▶감독:강제규 ▶출연:하정우, 임시완, 배성우, 김상호, 박은빈 ▶ 2023년 9월 27일 개봉/108분/12세관람가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