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제목은 2018년과 같이 ‘리처드3세’가 아니라 ‘리차드3세’로 표기했다 *
황정민은 누가 뭐래도 우리나라 최고의 연기파 배우이며, 흥행배우이다. 그런 황정민은 자신의 출신(!)을 결코 잊지 않으려는 듯 주기적으로 무대에서 자신의 연기력을 폭발시킨다. 뮤지컬 [오케피](2016)에 이어 2018년부터는 연극에 공을 들인다. [리차드3세]와 [오이디푸스]를 통해 ‘고전극’에 대한 애정을 숨기기 않았던 그가 다시 한 번 리차드 3세로 나섰다.
[리차드 3세]는 세계적인 대문호 윌리엄 셰익피스어의 작품이다. 영국, 정확히는 잉글랜드 왕국은 에드워드 4세 치하였다. 왕의 동생 ‘글로스터 공작’은 형을 위해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권력을 사수하기 위해 온몸을 던지면서 가슴 속에는 야심이 불타오른다. 형이 병상에 눕자 형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시작하고, 형수(엘리자베스)와 대립한다. 결국 형이 죽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드워드 5세)에 오르자 섭정의 자리에서 피로 얼룩진 ‘왕좌의 게임’을 펼치게 되고, 기어이 왕의 자리에 오른다. ‘리차드 3세’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권좌는 오래 가지 못한다. 영국왕실은 또 다른 혈통으로 수백 년간 그 영광이 이어질 것이다.
영국왕실 이야기나 셰익스피어의 연극은 기본적으로 ‘권력을 둘러싼 집안싸움’이다. 15세기 영국왕실이나 18세기 조선왕실, 21세기 한국 재벌가 집안이나 비슷하다. 그런데, 셰익스피어의 ‘리처드3세’가 5백년의 위엄을 잃지 않은 것은 작품이 전하는 주제의식과 함께 빛나는 캐릭터의 구축이다. 작품에서 만나는 리차드3세는 문학적으로 ‘비천한 외모’이다. 이전에는 ‘꼽추’, 지금은 ‘척추측만증’로 묘사되는 ‘신체를 가졌었다. 왕의 동생으로 ‘왕’이 될 수 없지만 ‘왕’이 되려는 의지는 그 누구보다도 강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서는 그가 ‘왕’이 되기 위해 펼치는 계략과 협박, 설득과 유혹, 악행과 폭언이 난무한다. 그는 왕이 되기 위해 기꺼이 피붙이를 사지로 내보내고, 가신들을 처형하고, 사람들을 호도한다.
황정민의 <리차드3세>는 ‘리차드3세’의 외형에 초점을 맞추고, 그의 개인기에 기댄다. 강한 콤플렉스를 가진 야욕의 남성으로. 뒤틀린 몸만큼 꼬여버린 내면이 황정민에 의해 폭발하는 것이다. 황정민이 보여주는 리차드는 뛰어난 언변과 유머감각을 가진 권모술수의 대가이다. 서재형 연출은 원작의 묵직함과 잔혹함을 기반으로 마키아벨리적 인물을 완성시킨다.
첫 장면, 미치광이할멈 같은 모습의 마가렛이 “그대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 그대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아는가.”라고 부르짖는 것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이다. “불만의 겨울은 가고 태양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여름이 왔구나”라며 권좌를 탐하는 리차드3세의 개인적인 결핍, 콤플렉스가 영국 왕실에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단정하거나, 엘리자베스가 “이로써 평화가 왔다”가 선포하는 것은 셰익스피어의 문학력이나 영국왕실의 무게감을 급속낙하시키는 감이 있다. 하지만, 황정민의 출중한 연기력이 시대와 공간이 다른 서초동 무대 위로 셰익스피어를 멱살 잡고 끌고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리차드3세’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리차드3세는 1485년 보스워스 전투에서 전사한다. 왕조의 교체, 폭군의 최후 뒤에는 항상 ‘역사적 단죄’가 따른다. 리차드3세의 평가는 혹독했다. 사납고 야만적이라는 빌런적 묘사와 함께 빠지지 않는 것이 외모비하이다. 절름발이이며, 굽은 등을 가졌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로, 세익스피어의 필력으로 오랫동안 전해졌다. (그리고 황정민은 그것을 충실히 무대 위에서 재현했고 말이다) 지난 2012년, 오랫동안 ‘리차드3세’의 시신을 찾던 학자들이 도심 주차장이 되어버린 옛 교회 터에 묻힌 리처드의 시신을 발굴한다. 법의학자는 그가 무기에 의해 치명상 입고 죽었다는 사실, 사망 후 굴욕적인 행위를 당했고, 급하게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그리고 DNA조사 등을 통해 신원을 확인한다. 두개골에 대한 3D매핑 결과 그의 얼굴은 ‘따뜻하고, 젊고, 진지’하단다.
지난 11일 개막한 연극 [리차드 3세]는 내달 13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된다.
출연: 황정민(리차드3세), 장영남(엘리자베스), 윤서현(에드워드4세), 정은혜(마가렛), 임강희(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