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하다. 그저 작품 한 편 봤을 뿐인데 마치 중년 아저씨의 삶을 깊숙하게 들여다본 것 같다. 아들에게 "너도 한 번 이혼해 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도 이내 사과하고, "50대면 지천명이라는데 내 인생 XX 허접해"라고 길거리에 나자빠져 앉아 자포자기하듯 말하는 이 남자의 인생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영화 '장르만 로맨스'(감독 조은지)는 범상치 않은 관계로 엮인 교수와 제자, 이혼한 아내와 출판사 사장, 그리고 아들과 옆집 여자가 그리는 유쾌 발랄한 이야기가 담긴 작품이다. 하지만 제목의 말 그대로 이 작품은 정말 '장르만 로맨스'다.
주인공 김현(류승룡 분)은 몇 년 동안이나 책을 내지 못하는 유명 작가다. 히트작을 낸 이후로 자신이 가진 명성을 잃을까 봐 차기작을 못 내고 있던 그는 두려움에 잠식되어 글을 쓰지 못한다. 절친한 친구인 담당 출판사 사장 순모(김희원 분)는 글쓰기를 강요하고 그는 자신 앞에 놓인 문제를 회피하기 바쁘다. 게다가 자식과 두 번째 아내를 유학까지 보낸 기러기 아빠 신세인 그는 혼자 남겨진 집에서 고독을 씹으며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한 학생, 유진(무진성 분)이 등장한다. 그는 동성애자로 김현의 집에 찾아와 다짜고짜 사랑한다는 고백을 날린다. 더불어 자신의 습작이자 자신의 이름이기도 한 제목의 글을 가지고 와서 평가를 해달라 부탁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의도치 않게 읽은 김현은 그의 훌륭한 글 솜씨에 신선한 충격을 받게 된다.
이후 '장르만 로맨스'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글을 보완하고 공동 저서를 출간하는 과정이 그려지는데 두 사람 이외에도 다양한 '관계'들이 등장한다. '관계'는 작품 속에서 김현이 유진에게 '문학을 하는 사람은 관계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는 장면으로 등장할 정도로 작품을 아우르는 키워드 중 하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작품 속에서 가장 관계에 대해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자신의 전 아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자신의 아들이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반항하고 지내는지 전혀 속마음을 파악하지 못 한 채 답을 듣지 못할 질문만을 던진다.
하지만 그는 유진을 만나며 변화한다. 상처를 받는 것이 취미였고 극복하는 것이 특기라고 말하는 유진은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동급생들에게 업신여김을 당하기도 하고 세상의 혹독한 시선을 겪어야 했지만 김현 앞에서만큼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용기 있는 태도를 보인다. 이러한 태도에 조금씩 김현은 자신 또한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깨고 문제들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의 매력은 연기파 배우들의 완벽한 티키타카, 그리고 쉴 새 없이 터지는 위트 넘치는 대사들의 말맛에도 있겠지만 그 속에 담겨 있는 메시지가 아닐까 추측한다. 중년 아저씨의 뒤늦은 성장기는 보는 관객들에게 우리의 인생사가 가지고 있는 고단함, 하지만 그것을 극복하는 힘에 대해 상기시킨다. 류승룡이 유진을 존중하며 건넸던 말처럼, 자신이 섞었던 색깔 속에서도 고유의 색깔은 남아 있으며, 그것만 가지고 있다면 인생을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게 만든다. 11월 17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