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극장가만큼이나 흥행대전이 치열했던 적은 없었다. 그것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은 뒷전이고 한국영화들끼리 이렇게 화제가 된 적은 더더욱 없었다. ‘지리산 웨스턴’이라는 유별난 민중봉기(!)를 소재로 다룬 ‘군도:민란의 시대’가 스타트를 끊었고 뒤이어 영원한 민족영웅 이순신장군의 ‘필사즉생’의 영화 ‘명량’이 극장가를 완전장악했다. 그리고 연이어 ‘해적:바다로 간 산적’이라는 순전히 오락영화의 본령에 충실한 영화가 개봉되어 극장주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느 것을 걸어야 더 많은 관객을 불러들일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해적’은 용케도 ‘군도’와 ‘명량’이 이야기하고자한 것을 다 이야기할 뿐 아니라, 그것이 갖추지 못한, 그 어떤 것까지 용해시켜 영화팬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명나라가 새로 개국한 조선의 권위 혹은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가장 주요한 수단으로 ‘하사’한 조선국왕의 국새(國璽)가 바다를 건너오는 중 어떻게 하여 고래가 꿀꺽 삼켰다는 말도 안 되는, 하지만 ‘있을 수도 있다는’ 설정아래 만든 영화 ‘해적’은 ‘명량’의 회오리바람 속에서도 재미있다는 입소문을 타고 흥행몰이를 하고 있다.
옥새의 행방, 해적의 여정
서기 1388년. 한반도 북방 신의주의 위화도에 진을 친 고려군 막사. 비가 내리는 가운데 이성계 장군을 둘러싸고 회군에 대한 격론이 펼쳐진다. 모흥갑(김태우)과 장사정(김남길)이 칼을 뽑아들고 싸운다. 조선건국의 과정에서 고래가 국새를 삼켰다는 것만큼 호기로운 상상력의 소산이다. 그리고 중국 무협물 못지않은 멋진 일합이 시전하더니 김남길은 그 길로 산적이 되고 만다. 바다에서는 여월(손예진)이 소마(이경영)를 쫓아내고 해적선장이 되는 과정을 재밌게 보여준다. 물론 그 와중에 코미디의 중심을 잡는 철봉(유해진)의 에피소드가 이어진다. 해적과 산적이 자리를 잡자마자 숨 돌릴 틈 없이 조선국새 찾기에 뛰어드는 해적과, 산적과, 관군의 논스톱액션이 펼쳐진다. 고래를 잡아 배를 갈라 위를 찢어 황금빛 옥새를 찾아야만 조선의 건국이 ‘승인’되는 모양이다. 저러다가 해적과 산적이 그야말로 ‘야합’이라도 해서 궁으로 돌진, 역성혁명을 일으키기기도 할지 모르겠다. 진시한 사극에 맹랑한 상상력이 이어진다.
여름방학에 충실한 오락영화
이순신 장군이 죽기를 각오하고 왜적을 무찌르는 ‘명량’에 비해 이 ‘해적’은 한없이 가볍고 경박하고 자유롭다. 실제 이성계의 야심이나, 새로운 나라에 대한 정도전의 포부쯤은 이 영화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공영방송 KBS의 ‘정도전’드라마가 할 일이지 여름방학에 개봉되는 오락영화로선 할 일이 못 되는 모양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 – 궁궐 담을 넘어 칼을 뽑아들고 임금에게 충고를 하는 장사정의 모습이 전혀 불필요한 것은 아니다. 관객에게 이 영화가 조선건국 초기를 다룬 정치코미디라는 확실한 이미지를 남겨주는 수미쌍관 편집일 테니 말이다. 이른바 조공/책봉 시스템이라는 기이한, 하지만 (당시의) 국제사회의 룰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넣어줘야 조선 산적의 기개라 할 것이다.
분명 ‘해적’은 ‘캐리비언의 해적’의 바다에 맞먹는, ‘라이프 오브 파이’의 고래에 버금가는 훌륭한 CG와, 참신한 아이디어, 그리고 기막힌 개봉 타이밍이 만들어낸 2014년 여름 오락물의 수작이다. (박재환, 2014.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