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누군가의 상실로 인해 삶에 무감해진다. 무언가를 느끼지 않으려 하는 노력은 점차 주위를 둘러싼 풍경이 보이지 않게 만들고, 끝내 흐릿한 눈으로 세상을 사는 것도 '나름 괜찮은 삶이다'라고 자위하게 만든다.
하지만 마음을 일으키는 일은 지금의 마음을 명확히 바라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원초적인 기억이다. 사랑의 기억부터 상실의 기억까지, 모든 감정을 제대로 마주하고 원초적인 아픔을 껴안음으로써 비로소 사람은 나아갈 수 있고, 살아갈 수 있다.
영화 '애플'(감독 크리스토스 니코우)은 원인 모를 단기 기억상실증 유행병에 걸린 ‘알리스(알리스 세르베탈리스 분)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에게 유일하게 남은 기억은 이름도 집 주소도 아닌 한 입 베어 문 사과의 맛이다. 그는 병원에서 기억력 회복 테스트를 받아보지만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며칠이 지나도 알리스를 찾아오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자 그는 무연고 환자로 분류되고 병원에서 새로운 경험으로 기억을 만들어내는 ‘인생 배우기’ 프로그램을 제안받는다. 그렇게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그는 어느 날 자신과 같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안나(소피아 게오르고바실리 분)를 만난다.
작품의 흐름은 고요하다. 기억을 잃은 환자 알리스의 시점을 비추며 그의 모든 행동들을 말없이 따라간다. 그가 지켜보는 것들,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는 과정을 정적으로 연출해 그의 시선만으로도 그가 느끼는 감정을 전한다.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은 작품 속에도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사진을 연상시키는 4대 3 화면 비율을 통해 주인공 알리스의 캐릭터를 관객들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선보인다.
더불어 알리스가 짓는 표정 안에는 언제나 멜랑꼴리함이 스며들어있다. 웃지도 않으며 항상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다니는 그는 아이의 자전거를 빌려서 타고, 물속에서 몸부림치며 수영을 하고, 춤을 추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도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영화는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그의 마음에 드리운 음영에 숨겨진 진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알리스가 비로소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는 장면을 통해 우리의 삶에 묘하게 숨겨져 있는 원리를 깨닫게 만든다.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마주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인생 배우기' 프로젝트의 지시 사항이 담긴 녹음테이프를 듣지 않는다.
정물화란 과일, 꽃, 화병 따위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들을 놓고 그린 그림을 뜻하는 말이다. 영화 '애플' 속 알리스가 기억하는 마지막 기억인 '애플'의 맛 또한 그런 존재다. 스스로의 의지가 없다면 건드릴 수 없는 과거의 원초적인 기억, 그곳에 정체된 채로 끊임없이 그를 고통 속에 박제시키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애플'을 건드리고 움직여 정체된 고통의 속박에서 벗어난다. 새로운 기억으로 삶을 덧칠해온 그가 반대로 원초적인 과거의 아픔을 더듬으며 고통에서 해방되는 과정은 지난날의 상실에도 오늘의 아픔을 마주할 용기만 있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이것은 우리 모두처럼 누군가를 잃어본 적 있는 크리스토스 니코우 감독의 진실된 위로이기도 하다. 5월 26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