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프리마 파시'
우선, 1959년 공개된 오토 프레밍거 감독의 영화 <살인의 해부>를 소개한다. 지금까지 가장 위대한 법정 드라마의 하나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아내를 강간한 남자를 총으로 쏘아죽인 남편'의 변론을 맡은 변호사 이야기이다. 변호사 제임스 스튜어트와 검사 죠지 스코트의 공방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법정에선 ‘아내’의 평소 행실과 옷차림새가 검찰의 공격 포인트가 되고, 변호사는 총을 들어야했던 남편의 정신 상태를 앞세운다. 수치스러운 모든 이야기가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떠벌려지고 배심원단은 사건 너머의 정황까지 생각하며 법의 심판을 내려야한다. 이 작품은 미국의 판사였던 존 D. 보엘커가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그리고, 2019년 호주의 인권변호사이자 극작가인 수지 밀러는 <프리마 파시>(prima facie)라는 작품으로 다시 한 번 ‘보이는 것과 보이는 것 너머’의 법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리마 파시’는 법률용어로 “일견 그럴듯해 보이는 표면상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법정에서 증거채택과 법정판단의 우선적인 기준이 되는 것이다. 연극 <프리마 마시>는 단 한 명의 출연배우가 무대 위에 올라 혼자서 떠들고, 이야기하고, 한탄하고, 변론하고, 좌절하고, 소리 지르는 작품이다. 이번 한국 초연무대에서는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이 트리플캐스팅되어 변호사 ‘테사’를 연기한다.
테사는 개천에서 난 용 같은 존재이다. 사회적 배경도, 명문학교 출신도 아니지만 뛰어난 학업성적으로 승승장구하는 형사사건의 변호사가 된다. 공연의 첫 장면은 법정에 선 테사의 용맹무쌍한 법정 전략을 보여준다. 마치 경마장의 말이 된 듯 트랙을 달려간다. 증인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회유하고, 구슬리고, 윽박지르더니, 마지막에 한 칼을 꽂아 검찰 측의 혀를 내두르게 하고, 판사의 상찬을 받는 유능한 변호사의 모습이다. 그렇게 자신의 일과 삶에 만족하던 테사에게 왕립변호사 자리를 제안 받고, 들뜬 마음에 평소 호감을 가졌던 동료와 ‘사무실’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리고 며칠 뒤 술자리가 끝난 뒤 자신의 집에서 그 남자에게 원하지 않은 ‘성적 침범’을 받는다. 테사는 그 때부터 기나긴 법정 공방에 나서게 된다. 공방의 초점은 명확하다. ‘원하지 않은 형국’이었느냐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한 차례 관계를 맺은 좋은 관계였고, 당사자의 집에서, 좋은 분위기에서 술을 많이 마신 상황’에서 벌어진 행위에 대해서 말이다. 그 상황을 어떻게 납득시키고, 어떻게 법적으로 성폭행이란 것을 증명하고, 법의 정신을 바로 세우느냐는 것이다.
연극 '프리마 파시'
<프리마 파시>에는 ‘배심원’이야기와 ‘브와 디르’(voir dire) 같은 우리에겐 생소한 재판절차가 나온다. 그런 영국의 법정이야기지만 이야기를 지켜보는 ‘한국의 관객’이라면 ‘비동의 강간죄’나 ‘부부간 강간’, ‘데이트 성폭행’ 같은 키워드가 자연스레 떠오를 것이다. 사건의 특성상 이런 남녀 간 분쟁이 법정에 오르고, 그 재판이 끝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어제까지 변호사의 입장에서 의뢰인의 법적 승리를 위해 법조문을 요리하고, 증인을 조련하던 테사는 하루아침에 피해자로 승산 없는 법정공방을 펼치는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랜 시간을. 테사가 승소했을까? 수지 밀러는 그 재판이 어떻게 끝날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영국의 경우가 궁금했다. 강간 등 성범죄의 경우 영국 법정에서의 유죄율은 60~65%란다. 의외로 높게 나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실제 경찰에 신고된 전체 사건에서 실제 유죄 판결까지 난 사건은 아주 낮다는 것이다. 2021~2022 통계에 따르면 70,330건의 강간이 신고 되었고 이중 실제 유죄판결은 1,378건(약 2%)이란다. 유엔이 인용한 자료에 따르면 영국 내 강간 피해자의 10명 중 1명만이 경찰에 신고하고, 신고된 사건의 1.3%만이 실제 유죄판결로 이어진단다. 우리나라는? 짐작할 것이다.
연극 <프리마 파시>는 배우 한 사람이 무대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작품이다. 관객들은 인물의 행동을 따라가며, 사건을 이해하고, 법정이란 게 얼마나 힘든 전장인지 알게 된다. 하지만 법은 똑똑히 배워야하고, 분명히 알아야한다. 테사의 케이스를 보고 명확히 기억하고, 확실히 행동하고, 분명히 일어서야할 것이다.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이 펼치는 1인극 '프리마 파시'는 11월 2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공연된다. (박재환)
[사진=쇼노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