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킹 아이스
4일 극장에서 개봉하는 싱가포르 안소니 첸(천쯔이) 감독의 중국어영화 <브레이킹 아이스>는 아주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의 배경은 중국 길림(지린)성 연길(옌지)이다. 우리가 잘 아는 조선족 동네이다. 이곳에 모인 길 잃은 중국의 세 청춘이 함께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여정을 담고 있다. 눈에 쌓인 백두산과 천지가 대광경이 그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나(주동우)는 연길에서 투어가이드를 하고 있다. 오늘도 관광버스에서 관광객을 위해 짧은 한국어를 알려주며 핫스팟을 다닌다. 하오펑(류호연)은 친구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연길에 온다. 조선족 스타일의 결혼피로연을 끝내고 갑자기 나나의 관광투어 버스에 오른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휴대폰을 잃어버린 하오펑은 나나의 도움으로 연길에 더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나나의 남자친구 샤오(굴초소)와의 저녁식사 자리에 가게 된다. 1주일에 한 번 있다는 상하이행 비행기를 놓친 하오펑은 나나, 샤오와 함께 예상치 못한 ‘7일간의 동행’을 시작한다. 함께 밥 먹고, 술 마시고,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하오펑은 나나와 사랑에 빠지고, 샤오는 당황하다. 그렇게 셋이서 비틀대며, 방황하며 백두산으로 향한다. 천지를 보면 무언가 달라질 것 같아서.
브레이킹 아이스
‘브레이킹 아이스’는 청춘영화이면서도 달콤한 로맨스영화가 아니다. 불안하고 혼란한 청춘의 미묘한 감정이 절묘하게 포착된다. 이들이 어떻게 그곳에서, 그 겨울에 만날 수 있었을까. 나나는 한 때 피겨스케이팅의 유망주였다. 무슨 사연인지 선수를 그만두고 훌쩍 빙판을 떠나 이곳에 정주하고 있다. 아마도 산산이 깨진 꿈을 속으로 부여안고 있을 것이다. 한쪽 발목의 상처만이 과거의 아픔을 유추할 수 있다. 하오펑은 영화초반 피로연장에서 걸려온 전화를 황급히 끊는다. ‘심리상담소 예약전화’이다. 상하이 금융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상하이에서 일하지만 고향은 허난(하남성)이란다. 분명 엄청난 압박감에 빠져 있음에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샤오는 어떨까. 그 역시 고향을 떠나 친척의 가게에서 일하고 있다. 나나와는 어떤 사이일까. 그는 변하지 않는 삶에 혼란스러워한다. 이들은 공허함,외로움, 고립감을 공유한다. 그래서 쉽게 친구가 되는 것 같고, 짧은 여정이나마 함께 한다.
영화에 몰입하면 그들의 더 깊은 이야기를 만나게 된다. 갑자기 찾아온 옛 선수시절 동료의 반응을 보면 어쩌면 나나는 ‘오래전 장난이었다는 일’이 퀴어스러운 일일지 모른다. 그것은 똑같이 하오펑과 샤오의 기이한 호텔 신에서도 감응할 수 있다. 감독은 흘러지나가는 대사를 통해 의도적으로 과거를 안개 속에 던져놓고, 현재를 흔들리게 하고, 미래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든다.
앤소니 첸 감독은 코로나 시기, 싱가포르 소시민 가족의 흔들리는 일상을 담은 <일로일로>로 주목을 받았다. 그의 신작 <브레이킹 아이스>는 싱가포르도 필리핀도 아닌 중국 연길에서 펼쳐진다. 나나, 하오펑, 샤오는 마치 <쥘 앤 짐>처럼 감정의 복잡한 교착을 그린다. 셋이서 서점에서 ‘제일 두꺼운 책’을 골라 달려가는 장면은 장 뤽 고다르의 <국외자들>에서 루브르박물관을 달려가는 청춘의 모습이 겹쳐진다. <브레이킹 아이스>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배우들의 연기로 깊이를 더한다. 불안한 청춘의 감정, 대사의 여백, 그리고 술집과 호텔의 분위기가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 서로의 길을 가게 될지 생각하게 만든다. 주동우는 언제나 그렇듯이 현대 중국 여성의 감성을 예민하게, 매혹적으로 연기한다.
싱가포르 감독이 만든 중국 로케영화에서 ‘단군과 환웅’의 이야기를 듣게 되다니. 신기한 영화임에 분명하다. 안소니 첸 감독의 매혹적 청춘드라마이다.
브레이킹 아이스
▶브레이킹 아이스(원제: 燃冬/The Breaking Ice) ▶감독: 안소니 첸천쯔이(陳哲藝, ▶출연:주동우, 류호연, 굴초소 ▶수입:찬란 ▶배급:(주)디스테이션 ▶공동투자: 퍼스트맨스튜디오, 소지섭 ▶개봉:2025년 6월 4일/100분/ 15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