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의사 안중근(1879~1910)의 거사는 이미 수많은 영화와 뮤지컬로 변주되어 왔다. <내부자들>의 우민호 감독은 이 익숙한 영웅의 연대기를 나열하는 대신,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의 총성이 울리기까지의 척박한 여정과 그 속에 소용돌이치는 인간적 고뇌에 집중한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동토를 걷는 독립군 안중근(현빈)의 뒷모습을 통해 구국의 사명 뒤에 숨겨진 지독한 외로움을 포착한다.
영화는 안중근의 개인사나 종교적 배경을 과감히 생략하고, 1908년 신아산 전투의 과오에서 시작한다.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준 일본군 포로로 인해 동료들이 몰살당했던 트라우마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무거운 공포이자 동력이다. 우민호 감독은 안중근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본군 모리와의 추격전, 그리고 독립군 내부에 존재할지 모르는 밀정 설정을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인다. 순수한 항일 투쟁의 길은 불신과 배신이 교차하는 스파이물로 변모하며 관객을 숨 가쁘게 몰아세운다.
안중근에 대해 이미 잘 아는 한국 관객에게 감독은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일본의 죄악을 나열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대신 나라 없는 처량한 독립군이 이국땅에서 겪는 불신과 단 하나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견뎌내는 북풍한설을 묵묵히 보여줄 뿐이다. 하얼빈 역에서의 거사와 뤼순 법정의 재판 과정이 다소 서둘러 마무리되는 느낌을 주지만, 이는 영웅적 결과보다 그 과정에 놓인 인간들의 '불안'에 더 힘을 실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영화 속 한 인물은 우리의 거사가 개죽음으로 끝나고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탄식한다. 실제 역사는 매국노의 득세와 독립운동가 가문의 몰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우민호의 <하얼빈>은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순수 애국자들의 이름을 다시금 호명한다. 서른 살 청년 안중근이 이국땅에서 이슬로 사라지기 전 마주했을 그 장엄하고도 쓸쓸한 풍경은, 오늘날 우리에게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를 묵직하게 되묻는다. ... (박재환영화리뷰.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