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소일기
홍콩 사회에서도 학업 스트레스와 가정 내 불화로 인한 청소년 자살은 심각한 사회병리적 현상으로 대두되고 있다. 탁역겸 감독의 데뷔작 <연소일기>는 이러한 비극적인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한 교실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유서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치유와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입소문을 타며 기대를 모은 이 작품은 아이들을 보살펴야 할 어른들에게 묵직한 숙제를 던진다.
영화는 고등학교 교사인 정 선생님(노진업)이 "나는 쓸모없는 아이"라고 적힌 익명의 유서를 발견하며 시작된다. 이혼 등 개인적인 아픔을 겪고 있는 정 선생은 유서의 주인을 찾기 위해 분투하던 중,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담긴 오래된 일기장을 펼친다. 일기 속에는 유능한 변호사 아버지의 학대와 성적 지상주의 아래 신음하던 형 요우지에와 모범생 동생 요우쥔의 아픈 기억이 서려 있다. "집안의 수치"라는 비난 속에 매를 맞던 소년의 절망은 정 선생의 눈물을 타고 현재의 위태로운 학생들에게로 이어진다.
탁역겸 감독은 실제 대학 동기의 자살이라는 개인적인 사연을 모티브로 삼아 이 영화를 완성했다. 감독은 친구가 죽기 전날까지도 낌새를 채지 못했던 후회를 영화적 진심으로 승화시켰고, 홍콩 금상장과 대만 금마장에서 신인감독상을 휩쓸며 그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영화 속 소년이 유일하게 위안을 얻었던 만화책의 응원처럼, 감독은 관객들에게 누군가 벼랑 끝에 서 있을 때 따뜻한 손을 내미는 '한 사람'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슬픔을 넘어, 살아남은 자들이 짊어져야 할 부채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말한다. 요우지에가 보던 만화책의 한 구절인 '절대 포기하지 마(不要放棄)'라는 메시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모든 청소년과 어른들에게 바치는 위로다. 삶이 비록 일기장 속에 아픔과 슬픔만 남기는 것 같을지라도, 그 기록을 통해 결국 누군가와 연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영화는 잔잔하게 전한다. #800자리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