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장예모(장이머우), 진개가(천카이거) 감독이 무슨 작품을 내놓는지는 관심이 없겠지만 예전엔 이들 중국 ‘5세대 감독’들이 정말 각광받았었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포함한 해외영화제에서 말이다. 그리고 2000년대가 되면서 ‘6세대 감독’ 또한 주목받았다. 이런 세대구분은 지극히 서구적인 분류법이어서 당사자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단다. 어쨌든 6세대 감독 중 대표감독이 바로 로우예(婁燁,루엽)이다. 로우예 감독의 영화 <슈주>가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한국영화팬에게 소개되었고, 그 이듬해 한국 극장가에서도 개봉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24년이 지나 다시 한 번 한국 극장에서 공개된다.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쳤고, 제목도 <쑤저우강>으로 변했다. 예전에 이 영화를 보았던 사람이라면,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마음이 싱숭생숭할 것이다.
제목으로 쓰인 ‘쑤저우강’(蘇州江)은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도시 중 하나인 소주(蘇州)에서 상하이의 황포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이다. ‘우쑹강’(呉淞江)으로도 불린다. 지금은 중국 상하이가 천지개벽을 ‘여러 차례’ 해서 그 옛날의 (더럽거나 고풍스러운) 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 것이다. 이 영화로나마 2000년 무렵의 중국 쑤저우 강변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쑤저우강은 화자(話者)인 비디오촬영기사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영상에 담긴 쑤저우강과 강변의 사람들은 그 시절의 중국인민의 모습을 박제하는 듯하다. 100년의 전설과 추억, 온갖 쓰레기가 쌓여 더렵혀져 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이 강물에 의지하여 살고 있고, 어쩌면 영원이 이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야기는 두 개의 이야기, 어쩌면 인연이 교차한다. 술집 ‘해피 바’(世紀開館)의 사장의 부탁으로 업소의 인기프로그램인 ‘인어 쇼’를 홍보할 영상을 촬영하게 된다. 술집 중앙의 수조에는 인어꼬리를 단 메이메이(美美)가 있다. 그리고 곧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메이메이는 끊임없이 그들의 사랑을 의심한다. “내가 사라지면 당신은 ‘마다’처럼 날 끝까지 찾아다닐 거냐고”고. 그리고 ‘마다’라는 남자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상하이에서 오토바이 배달 일을 하는 ‘마다’는 술 밀매업자의 딸 무단(牡丹)을 부탁받는다.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열여섯 소녀 무단은 과묵한 마다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마다는 패거리와 함께 음모를 꾸민다. 무단을 유괴하여 돈을 뜯어 내려한다. 믿었던 마다에게, 아마 태어나 처음으로 연정을 느꼈던 남자에게 절망감을 넘긴 무단은 마다가 보는 앞에서 쑤저우강에 뛰어든다. 무단이 한 마지막 말은 "인어가 되어 돌아올 거야."였다. 무단의 사체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쑤저우강 일대에 인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돈다. 세월이 흘러, 출옥한 마다는 무단을 찾아 헤매다가 ‘해피바’에서 그녀와 너무나 닮은 메이메이를 발견하게 되고 자신의 이야기, 인어의 전설을 들려준다.
중국의 인기 여배우 저우신이 ‘메이메이’와 ‘무단’ 1인 2역을 했다. 그래서 관객들은 보면서 당연히 둘이 같은 인물일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영화는 죽은 사람의 환생이나, 떠나간 인연에 재회를 이야기가 아니다. 쑤저우 강변의 사람들은 제각기 사연을 갖고 있을 터이다. 이런 저런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청춘이 그렇고 그렇게 만나 헤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물론, 술집이 배경이고, 무뢰한의 유괴사건이 끼어들면서 예상하는 낭만적 러브스토리는 만날 수 없다. 한창 때의 왕가위 감독의 카메라 워킹과 편집방식을 보는 것 같고, 그 시절의 청춘의 고뇌를 지금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아니, 시대의 흐름 때문인지 더욱 애달프게 다가온다.
로우예 감독은 당시 중국영화당국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이 영화를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 출품했다. 상을 받았지만 이 영화는 중국 내 상영이 불허된다. 그리고 다음 작품 <여름궁전>(원제:頤和園이화원)도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쑤저우강>에서는 어두운 도시의 범죄물이라서, <여름궁전>에서는 (1989년의) 천안문사태를 거론하는 것 때문에 중국당국의 비위를 거슬렀을 것이다. 어쨌든 중국에서 더 이상 영화를 찍기 어려울 것 같았던 로우예는 이후에도 열심히 작품을 만들고 있다. 중국영화계는 요지경인 셈이다. 그만큼 중국 영화인들의 창작열정이 대단한 셈일지 모른다. 영화에서는 동방명주타워와 진마오빌딩(金茂大厦)이 보인다. 20여 년이 흐른 뒤 그 빌딩들 보다 훨씬 높은 고층건물이 상하이의 모습을 바꿨다. 더럽고, 음침하고, 뭔가 비밀을 수장시키고 있을 것 같은 쑤저우의 모습을 지금 본다면 로우예의 <쑤저우강>은 더욱 특별해 보일 것 같다. 강물은 흐르고, 사람은 늙고, 중국은 변할 것이다. 시간 앞에 장사가 없다. 참, 오토바이 배달부를 연기한 배우 자훙성(賈宏聲)은 2010년 건물에서 떨어져 삶을 마감했다. 그때 나이 43살이었다.
▶쑤저우강 (원제:蘇州河/Suzhou River) ▶감독:로우예(婁燁) ▶출연:저우신(周迅), 자훙성(마다) ▶수입/배급:에이케이엔터테인먼트(주) ▶개봉:2024년10월9일/79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