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감독을 꼽으라면 후효현(허우샤오셴)과 양덕창(楊德昌/에드워드 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양덕창 감독이 1994년 발표한 영화 <독립시대>(원제:獨立時代/A Confucian Confusion)는 그의 여타 작품과 마찬가지로 대만사회의 혼돈과 대만인의 착란상태를 보여준다. 물론, 1994년도 시점이다. 30년의 시간이 지난 뒤, 대만 사회는 어떤지, 그의 고민은 해결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른바 양덕창 감독의 ‘신 타이베이 3부작’의 하나이다. 나머지 작품은 <마작>(96), <하나 그리고 하나>(2000)이다. 물론, 양덕창 감독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고령가 소년살인사건>(91)일 것이다. 이 작품은 2022년에 4K로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친 뒤 79회 베니스영화제에서 공개되었다. 그 버전이 25일 한국극장에서 개봉된다. 작품은 1990년대의 타이베이의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때가 어땠냐고? 변화의 소용돌이에서 기회를 잡기 위한 사람들로 욕망이 폭발하던 시기이다.
<독립시대>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주로 네 명의 인물을 중심을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들은 학연으로, 혈연으로, 그리고, 비즈니스 관계로 이어져있다. 몰리, 치치, 샤오밍, 버디는 동창관계이다. (‘몰리’나 ‘버디’ 같이 영어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대만 사회의 유행이었다) 몰리는 아킴의 미혼처(未婚妻)이다. 결혼을 약속한 사실혼 관계이다. 대기업 대표인 아킴은 몰리가 광고회사를 운영하는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도록 지속적인 재정지원을 해주고 있다. 몰리의 업무를 돕는 비서는 동창 치치이다. 오드리 헵번 헤어스타일의 치치는 항상 순종적인 미소를 보이며 모든 일에 헌신적이다. 치치의 남친 샤오밍은 경제관련 부처에서 일하는 유능한 공무원이다. 버디는 열정적인 무대연출자이지만 열정이 너무 충만하다. 이제 이들이 복잡하게 얽혀든다. 성공을 위해, 사랑을 위해. 1994년의 타이완 수도, 타이베이의 고층빌딩 사무실에서 말이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랑과 전쟁>의 순한 버전이다. 모든 관계는 감정적 사랑과 계산된 결혼관계로 이어진다. 몰리와 아킴의 경우만 보아도 결혼을 약속한 커플이지만, ‘쇼잉’ 부부일 수도 있다. 그들은 서로 충분히 사랑하지만, 그런 관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그 틈새에 다른 사람이 끼어들며 또 다른 사랑을 꿈꾸는지 모른다. 물론,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비즈니스인지는 알 수 없다. 기본적으로 친구들이니.
영화는 또한 예술과 기업경영을 이야기한다. 무대연출자 버디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다음 작품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그 작품은 표절작이다. 버디는 ‘지금의 타이베이 사람들은 포스트모던 극을 이해 못한다’고 말하여 ‘대중적 희극’을 준비 중이다. 대중적 작품의 흥행에 대해서는 “흥행이라는 것이 가장 민주주의다. 표를 사는 것이 투표이고, 흥행이 많이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평등하게, 취향이 같다는 것이다.”고 강변한다. 당시, 대만의 암울한 자국 영화 박스오피스를 생각한다면 영화감독 양덕창의 자조(自嘲)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에서는 가장 세속적인 인물로 나오는 버디의 말과 행동이 의외로 그 시절의 대만 예술계(영화계 포함)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영화는 대만의 혼란스러운 정치상황을 비켜가지 않는다. 대만은 국민당의 장개석이 대만을 장악한 뒤 오랫동안 계엄령이 지속되었었고, 그의 사후 1987년에야 계엄령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대만 민주화’가 작은 섬을 뒤흔들었고 중국과의 교류는 무역에서부터 착착 진행되었다. <독립시대>에서는 기업인 ‘아킴’이 중국과의 거래를 위해 뛰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이데올로기의 총부리를 겨누던 그들이 또 한 번의 국공합작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몰리와 하룻밤을 보낸 샤오밍이 얼이 빠진 듯 중얼거린다. “지극히 정상이야. (비리를 저지른) 아버지가 감옥에 간 것도 죄를 지었기 때문이야. 의화단도, 문화대혁명도, 천안문도, 중국통일도 다 정상이지.”라고.
영화는 혼란스러운 낮과 밤을 보낸 인물들이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리게 된다.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에서 해고되든지, 경제적으로 어렵더라도 또 다른 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적어도, 마지막 장면에서 엘리베이터 앞의 치치와 샤오밍의 결정처럼 말이다.
<독립시대>는 누군가의 홀로 서기를 말한다. 그것이 정신적 자아이든지, 경제적 자립이든지. 물론, 대만의 독립일 수도 있다. 양덕창은 영화에서 줄곧 공자의 이야기를 자막으로 보여준다. 그것은 1990년대 대만인의 혼란스러운 정신세계이다.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A Confucian Confusion’이다. 언어유희이겠지만 오랜 정신적 지주, 공자의 윤리관이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현실에서 흔들거리는 것이다.
▶독립시대 (獨立時代/A Confucian Confusion) ▶감독: 양덕창(楊德昌/양더창) ▶출연: 진상기(치치), 예숙군(몰리), 왕유명(샤오밍), 등안녕(래리), 왕백삼(아킴), 진이문(리런), 금연령 ▶개봉:2024년 9월25일/129분/15세이상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