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극본은 스테디셀러이다. 그의 장막극(長幕劇) ‘갈매기’ ‘바냐삼촌’, ‘세자매’ ‘벚꽃동산’은 연극영화과 학생에게는 넘어야할 과제이고, 대학로에서는 끊임없이 리바이벌 상연된다. 체호프가 1903년에 발표한 그의 마지막 작품 <벚꽃동산>은 제정 러시아의 몰락해가는 귀족집안을 이끄는 라네프사카야 부인 패밀리의 서글픈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미 시대는 바뀌었다. 농노를 거느리고, 우아하게 살던 귀족들은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경제적으로 무너져 내린다. 그들의 찬란했던 기억과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던 부동산은 이제 신흥 부자에게 넘겨줘야한다. 이 유명한 원작의 시대적 배경을 ‘2024년 한국사회’로 바꾸어 본다면? 연출자 사이먼 스톤이 그런 발칙한 도전에 나섰다. 지난 4일부터 마곡에 위치한 LG아트센터 LG SIGNATURE홀에서 공연되고 있는 연극 <벚꽃동산>이다.
원작 ‘벚꽃동산’은 지난 세기 말, 농노제가 해체되는 격변의 러시아 사회를 배경으로 한다. 레닌의 혁명이 일어나기 전, 내부에서 서서히 붕괴되고 있던 지주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지주 라네프스카야를 중심으로 무너져 내리는 구세대의 상징인 오빠, 시대의 흐름을 잘 타서 사업가로 출세한 농노의 아들, 진보적 사상의 대학생, 늙은 하인, 젊은 하녀, 집사 등이 이 저택을 중심으로 뒤엉키며 새로운 관계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다.
사이먼 스톤의 ‘벚꽃동산’ 무대는 심플하다. 하얀 색 프레임의 2층 구조이다. 1층에는 거실이 있고, 박공 구조의 2층에는 침대가 놓인 방이 보인다. 우측에는 가파른 계단이 있고, 2층에는 발코니가 있다. 흔들리는 인물이 그 지붕 위에 우뚝 서서 불안하게 아래를 내려다보기도 한다. 인물들은 1층 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가고,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간다. 거기서 다시 뒤에 놓인 계단을 통해 꼭대기의 공간에 이른다. ‘벚꽃’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저 앞에 펼쳐지는 벚꽃동산을 보라”라는 대사가 있다. 바로 그런 ‘벚꽃동산’이 보이는 모던한 저택에서 과거에 연연하고, 현재를 한탄하며, 미래를 허망하게 기대하는 사람들 이야기이다.
송도영(전도연)의 가족은 시대의 흐름을 전혀 쫓아가지 못한다. 몽상가인 오빠는 사업에서는 완전 무능이어서 가계는 쪼들리고, 가업은 파산 직전이다. 그 가문의 부와 위상은 점차 황두식(박해수)의 차지가 되고 있었다. 황두식은 원래 이 집 운전기사의 아들이었다. 시대는 그렇게 바뀐 것이다. 대저택의 사장님 기사의 아들이, 집념과 오기로 돈을 긁어모으더니 마침내 그 저택과 기업, 벚꽃동산을 차지하는 것이다.
‘벚꽃동산’은 전도연이 27년 만에 무대로 돌아와서 열연을 펼치는 작품이다. 갈수록 기울어가는 가세를 일으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도 알코올에 무릎 꿇고, 오빠와 가족을 비난하고, 현실을 부정하려고 발버둥칠 뿐이다. 박해수는 그런 송도영의 체면과 재산을 지켜주기 위해 나름 노력하는 듯하지만 결국엔 구제불능의 사람들을 대체하고 만다. 연극 ‘벚꽃동산’은 전도연, 박해수 말고도 모든 배우들이 각자의 캐릭터를 무대에서 완벽하게 세운다.
사이먼 스톤이 구성한 ‘2024년의 한국판 벚꽃동산’은 가업의 파산을 앞둔 남매 송도영(전도연)과 송재영(손상규), 성공한 사업가 황두식(박해수)을 중심으로, 기울어가는 가업을 지키려고 혼자 발버둥치는 강현숙(최희서)과 그의 철없는 동생 강해나(이지혜), 이상주의적 인물 변동림(남윤호), 재벌집 가정부에 만족하는 정두나(박유림), 송도영의 개인비서 이주동(이주원), 젊은 운전기사 신예빈(이세준), 그리고 이 극의 현실적 피에로인 사촌 김영호(유병훈)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열연을 펼친다.
작품을 보고나면 과거에 주저앉은 구세력과 어정쩡한 회의론자, 대책 없는 몽상가 사이에서 결국 누가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를 설계해서, 세상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마도 ‘개츠비의 벚꽃동산’은 그 다음에 등장할 드라마일 듯하다.
연극 ‘벚꽃동산’은 지난 4일 개막하여 7월 7일까지 LG아트센터 LG SIGNATURE 홀에서 공연된다.
[사진=ⓒStudio AL 1858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