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열린 제92회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개 부문을 수상한 자랑스러운 한국영화 <기생충> 팀이 다시 한 번 무대 위에 섰다. 19일 오전, 서울 중구 웨스틴조선호텔에서는 오스카 4관왕 영광의 주역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국 관객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기생충 아카데미 수상기념 기자회견‘이 열렸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마스크를 쓴 취재진 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열린 이날 행사에는 봉준호 감독과 제작사 바른손이앤에이의 곽신애 대표, 한진원 시나리오작가, 이하준 미술감독, 양진모 편집감독 등 제작진과 배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박소담, 이정은, 장혜진, 박명훈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서는 아카데미 시상식과 그 전에 잇달아 열리는 미국영화계 각종 직능단체들의 시상식에 참석한 소감과 <기생충>과 다음 작품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봉준호 감독은 "제작발표회를 가졌던 바로 이 장소에서 1년 만에 다시 이런 자리를 갖게 되었다. 영화가 긴 생명력을 가지고 세계 곳곳을 다녔다. 기분이 묘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이 전 세계적으로 열화 같은 반응을 받은 이유에 대해 “이전 작품 '괴물'과 '설국열차'에는 SF적 요소가 많았다. 이번 영화는 동시대의 이야기, 우리 이웃에게 있을 법한 이야기를 다룬다. 게다가 뛰어난 앙상블의 배우들이 실감나게 표현했다. 현실에 기반을 둔 이야기라서 그런 폭발력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본다.”며, 차기 작품에 대해서는 “준비하고 있는 두 편의 작품은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평소 하던 대로 준비하고 있다. 완성도 있는 영화를 정성스레 만들 생각이라는 기조가 계속 유지될 것이다. (기생충 이후) 접근 방식이 달라지거나 그렇지는 않다.”고 밝혔다.
봉준호 감독은 헐리우드의 거대 영화사들의 기라성 같은 걸작 사이에서 이룬 성과에 대해 이렇게 자평했다. “후보에 오른 영화들이 오스카 캠페인을 열심히 펼친다. 저희는 네온(Neon)이라는 중소배급사와 일했다. 게릴라전인 셈이다. 거대 스튜디오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예산이지만 열정으로 뛰었다. 실제로 송강호 선배가 코피를 흘리기도 했다. 인터뷰가 600개 이상, 관객과의 대화도 100회 이상 했다. 다른 작품들이 물량공세를 펼쳤다면 저희는 팀워크로 똘똘 뭉쳐 물량의 열세를 커버했다."
봉 감독은 오스카 캠페인에 대해서는 “노아 바움벡 감독이나 타란티노 감독을 보면 바쁜 창작자들이 일선에서 벗어나 많은 시간을 들여 캠페인을 하는 것이 낯설고 이상하게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작품을 밀도 있게 검증하는구나 싶었다.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영화를 만들었는지 점검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마지막에 아카데미에서 피날레를 장식하게 되는 것이고, 전통을 가진 과정이었다고 생각이 들었다.”고 덧붙였다.
아카데미 수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이 보였던 감동적인 수상소감 장면이 패러디된다는 것에 대해 봉 감독은 “유세윤과 문세윤은 정말 천재적이다. 최고의 엔터테이너.”라며 함박웃음을 지은 뒤 “오늘 아침에 마틴 스콜세지 감독님이 편지를 보내왔다. 저로서는 영광이었다. 마지막 문장에 '수고했고 조금만 쉬어라'라고 했다. 차기작을 기다리신다고 했다. 감사하고 정말 기뻤다.”고 말했다.
흑백 <기생충>, 냄새가 더 난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여세를 몰아 곧 흑백버전의 <기생충>이 개봉된다. 흑백판에 대한 의중도 밝혔다. “'마더' 때도 흑백판을 만든 적이 있다. 고전이나 클래식에 대한 동경, 로망이 있다. 모든 영화가 흑색인 시절이 있었다. 영화 매니아 분들이라면, 그런 관심, 호기심이 있다. 홍경표 감독과 의논을 해서 흑백 버전을 만들었다. 로테르담 영화제서 상영했는데 똑같은 영화인데 묘하다. 선입견을 가지실까봐 말씀을 드리긴 어렵다. 영화제에서 한 관객이 흑백으로 보니까 더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 하더라. '마더' 때도 그렇지만 배우들의 미세한 표정, 섬세한 연기의 디테일, 뉘앙스를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컬러들이 사라지니 눈빛과 표정에 집중할 수 있다.”
한편 봉준호 감독과 함께 각본상을 수상한 한진원 작가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며 만나게 된 여러 분들, 가사도우미, 수행기사님들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저는 서민으로 태어났기에 박 사장의 집은 판타지였다. 취재원들과의 취재가 그래서 중요했다. 디테일을 쫓아나가는 작업을 했다.”고 밝혔다.
이날 한 작가는 아카데미에서 말한 ‘충무로’에 대해 “사실, 요즘 충무로엔 영화사가 얼마 없다. 다들 강남에 있다.”고 말해 웃음이 일었다.
한편 <기생충>을 제작한 바른손이앤에이의 곽신애 대표는 ‘오스카 트로피’의 행방에 대해 밝혔다. “4개 부문에서 6개의 트로피를 받았다. 영화제에서 정해놓은 수상자가 있고, 이름이 쓰여 있다. 좋은 취지의 상황이 있을 때 전시나 그런 고민을 하겠다. 봉준호 감독이 4개를 다 받아서 무겁다고 1개는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다.”
TV판 <기생충>, 5년은 기다려야할지도
<기생충>은 미국에서 TV드라마로 만들어진다. 봉 감독은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연출은 이후에 차차 찾을 예정이다. <빅쇼트>와 <바이스>의 아담 맥케이가 작가로 참여한다. 몇 차례 만나 이야기도 나눴다. 영화 <기생충>이 가진 주제 의식, 동시대의 빈부격차에 대한 이야기를 오리지널과 마찬가지로 더 깊게 파고들 것 같다. 리미티드 시리즈라는 명칭을 쓰더라. 시즌을 길게 가는 것이 아니라 '체르노빌' 같은 시리즈처럼 밀도 있는 TV시리즈를 만들려고 한다. 틸다 스윈튼, 마크 러팔로 언급이 나왔는데 공식 사항은 전혀 아니다. '설국열차'도 미국에서 5년여 만에 방송된다. '기생충'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순조롭게 첫 발을 디디고 있는 상황이다.”고 밝혔다.
이날 충무로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도 나왔다. <플란다스의 개> 같은 시나리오가 요즘 충무로에서 영화로 만들어질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봉 감독은 “해외에서 많은 질문을 받는다. 요즘 젊은 감독이 <플란다스의 개> 같은 시나리오, <기생충>과 똑같은 각본을 들고 왔을 때 과연 투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20년 간 눈부신 발전과 동시에 젊은 감독이 이상한 모험적인 작품을 하기엔 어려워지는 경향이 있다. 재능 있는 친구들이 산업으로 흡수되기보다 독립영화만 만드는, 평행선을 이루는 부분이 안타깝다.”면서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홍콩 영화가 어떻게 쇠퇴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런 길을 걷지 않으려면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영화가 가진 리스크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적 영화를 산업이 껴안아야 한다. 최근에 나온 훌륭한 독립영화들을 보면 워낙 큰 재능이 이곳저곳 꽃 피고 있다. 좋은 의미에서 산업과의 충돌이 일어날 것이라고 희망적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정치권에서 펼치고 있는 ‘기생충 마케팅’(생가보존, 동상 설립 등)에 대해 봉 감독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도 기사를 봤다. 그런 이야기는 제가 죽은 후에 해주셨으면 좋겠다.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리라 생각한다. 딱히 할 말은 없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과 이후 아카데미 정복까지, ‘영화촬영 기간보다 더 긴 오스카 캠페인’을 펼친 봉준호 감독과 배우들, 스태프들은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서 더 좋고, 더 화려하고, 더 충무로스런 영화를 준비할 예정이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기생충' 기자회견장 봉준호/ 전체 샷]
[동영상 = 케첩 유튜브/ 촬영=정영인 편집=맹루디아 (KBS미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