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내 입장이 되어 보세요”
금요일 밤, 11일(토) 00시 40분 ‘KBS 독립영화관’ 시간에 방송되는 영화 ‘죄 많은 소녀’는 원래 작년 9월 방송예정이었다가 당시 태풍 링링이 한반도를 급습하면서 뉴스특보가 긴급 편성되며 결방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영화 100년 더 클래식’이 12주 동안 방송되며 자연스레 방송이 밀리더니 마침내 시청자를 찾게 된 것이다. 기다린 보람이 있는 잘 만든 한국 독립영화이다.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는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소개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영화는 <여고괴담>에서 출발한 학교공동체의 문제의식과 <한공주>가 붙잡은 한국사회의 병폐를 절묘하게 배합하며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집단 성폭행을 다룬 것은 아니다. 여고생의 자살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영화는 한 학생이 학우들 앞에 서서 신상발언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소녀는 극도로 의기소침해 있으며, 뭔가 주눅이 들린 듯하다. 소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소녀는 수화로 뭔가를 애타게, 절박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소녀가 겪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사건은 여자고등학교의 그렇고 그런 학생들의 일탈을 담담하게 따라간다. 화장품샵에서 물건을 훔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승희(전여빈), 한솔(고원희), 경민(전소니). 그날 밤, 경민이 사라진다. 마지막까지 함께 있었던 승희는 친구들로부터, 학교(선생님)로부터, 그리고 마침내 경찰로부터 의심을 받기 시작한다. 하지만 가장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것은 경민의 어머니(서영화)의 반응. 불온한 며칠이 지난 뒤 경민의 사체가 한강에서 발견되고 뒤숭숭한 일들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승희는 끝까지 그날 밤의 전말을 밝히기를 꺼려한다. 그러는 사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경민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경찰은 경찰대로 사건을 무마하거나 해결하려 한다. 대부분 하루빨리 잊히기를 바라고, 아무도 승희의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영화는 ‘여고생’ 특유의 또래의식이 내포된 죽음의 게임인지, 잘못 어울린 불량서클에서의 희생양인지, 아니면 가정문제의 연장선상인지 뚜렷한 답을 주지 않으며 진행된다. 물론, 경찰의 미덥지 못한 수사방식도 그런 분위기에 일조한다.
‘죄 많은 소녀’는 배우들의 음침하고, 기죽은 연기로 온통 회색빛이다. 승희를 연기한 전여빈은 사건의 전말을 알면서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 지나면 말하려고 해도 이젠 들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에서 승희는 생리 중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닌 듯하다. 마치, 그가 피해자든 가해자든 가리지 않고, 증언을 겁박하듯이.
경만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서영화는 그녀 배우 커리어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다. 다음 대사와 다음 행동을 전혀 예상 못하게 하는 신경질적이면서도, 날카로운 연기를 절묘하게 펼치는 것이다. ‘딸아이’에 걸었던 기대심과 사후 듣게 되는 이야기의 불일치에 그녀의 정신은 반쯤 나갔는지 모른다. 영화는 단락단락 소통의 절벽을 보여준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학생과 선생 사이에서도, 선생과 교장사이에서도, 승희와 경민, 승희와 한솔 사이에서도 모든 것이 겉도는 관계뿐이다.
결국 승희는 경민이 마지막 걸었던 굴다리를 혼자 지나간다. 이미 친구들과 경민 어머니에게 이야기한 상태이다. “내일이면 어떤 상황에 놓일지.” 영화는 승희가 어두운 굴다리 저편으로 사라지면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관객은 그 순간부터 승희의 마지막 발자국소리, 숨소리 하나라도 듣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내일이면 당신도 그 결과를 듣게 될지 모를 일이다. 승희의 목구멍에서 꽉 막힌 이야기가 KBS 독립영화관을 통해 제대로 전달될지는 모르겠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 영화 '죄 많은 소녀' 스틸 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