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강변호텔>이 지난 달 말 개봉되었다.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래 23년 만에 선보이는 23번째 장편영화이다. 홍 감독은 2009년 옴니버스 영화 <어떤방문>의 단편 <첩첩산중>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번이 24번째 연출작이다. 그리고 <강변호텔>은 김민희가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2015) 이래 6번 째 함께 한 작품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철저한 사(私)영화이다. 그가 경험한 세상을, 그가 바라보는 시각으로, 그가 좋아하는 연기자를 데리고, 그의 방식으로(신속하게) 찍고, (해외영화제를 통해) 화려하게 공개하고, 정작 국내에서는 조용하게 “또 한편 만들었습니다”라며 흔적만 남긴다. 이번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홍상수 스타일의 홍상수영화’이다.
기주봉은 시인이다. 두 아들이 어릴 때 무정하게 집을 나가 버린다. 이제 늘그막에 북한강 어느 조그만 호텔에 머물고 있다. 호텔사장의 호의로 2주째 이곳에 머물고 있다고 한다. 호텔 밖 풍경은 눈이 하얗게 천지를 덮고 있다. 시인 기주봉은 로비에서 아들을 만나기로 했다. 방을 나오는데 웬 여자가 눈에 띤다. 김민희이다. 이 여자는 같이 살던 남자에게 배신을 당한 뒤 이 호텔에 방을 잡고 지내고 있단다. 선배언니 송선미가 와서 위로를 건네고 함께 하루를 보낼 예정이다. 기주봉의 두 아들은 권해효와 유준상이다. 그 다음은 똑같다. 커피를 마시다가 술을 마시고, 자기의 지난 이야기를 하다가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서로의 팍팍한 삶과 결론 없는 이야기는 밤이 깊어가며 자리를 옮기게 된다.
홍상수 영화는 뻔한 이야기가 있다. 단조롭지만 중년남자의 - 이제는 조금 더 나이든 장년의- 성숙한, 때로는 조급한 이야기가 웅크리고 있다. 자기 곁에서 자기 이야기만 열심히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이 있다고 믿는 그 시간을 보내고 난 뒤 엄습한, 불안과 초조감이 녹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홍상수 영화는 장대한 시간흐름의 실시간 영화인 셈이다.
(홍상수 감독 영화를 열렬히 보는) 관객은 언제나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가족의 이야기와 그가 하는 일에 대해. 이번엔 시를 썼다. 그러니 자연히 그 시의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수줍게 고백하는 연가에 말이다.
극중 시인에게는 노벨문학상감 영광도, 북한강 강변에 어울릴 단아한 시비(詩碑)도 없다. 하지만 눈 덮인 작은 호텔에서 알아보는 사람이 있는 소박하고, 절제된, 미니멀한 문학의 기억만이 존재한다.
이번 영화가 특이하다면 이제 그의 영화에 죽음이 정면에 등장한다는 것. 술에 취한 시인은 애타게 젊은 여자에게 “아름답습니다”와 “감사합니다”고 말을 건넨다.
시인은, 아니 감독은 물리적 시간이 야속해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애써 감추려는 조급함이 흑백 스크린 저쪽에서 고개를 내민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