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호메로스)작품이나 그 옛날 희랍문화에 대해선 몇 편의 영화로 조금은 알고 있다. 에게해(海) 근처에 산재해 있던 당시 도시국가들이 힘을 합쳐 페르시아 세력을 꺾었고, 곧이어 그 유명한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접수한다. 그 때까지 이곳은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했고,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최고수준의 문화를 향유하였다. 어떤 문화? 높은 언덕에 위치한 아크로폴리스의 야외극장 디오니소스에서 형식적으로 최상의 수준에 다다른 연극을 아테네 시민이 맘껏 즐겼다. 옛 기록과 유적을 통해 이 근사한 공연장에서는 수많은 명작들이 관객들을 눈물과 웃음, 한탄으로 몰아넣었다. 지금부터 무려 2500년 전에 말이다.
관객을 쥐락펴락한 것은 배우들의 열연이었겠지만 주인공은 역시 그 연극의 대본을 쓴 작가이다. 수많은 공연의 이야기를 써내려간 작가들 중에는 ‘3대 비극작가’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소포클레스가 있다. 그가 쓴 작품은 100편이 넘는 것으로 사료되지만 현재 전해지는 것은 7편뿐이다. 그중 오늘날까지 가장 각광받는 작품이 바로 ‘오이디푸스’이다. 오이디푸스는 ‘부은 발’(swollen foot)을 뜻한다. 영화배우 황정민이 올해 선택한 작품이다. 황정민은 영화에서 ‘뜻’을 이룬 후, 옛날 연극하던 배고픈 시절을 기억하며 “기회가 되면 꾸준히 연극을 할 것”이라고 호언했고, 작년 <리차드3세>에 이어 올해 <오이디푸스>를 선택한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그리스 신화 속 이야기를 토대로 한다. 소포클레스는 신들의 이야기에서 인간의 비극을 뽑아낸다. 연극은 테베의 왕 오이디푸스가 가뭄에 고통 받는 백성들의 울부짖음을 듣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는 오이디푸스는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말에 주목한다. 선대 왕, 라이오스를 죽인 범인을 잡아야 나라에 쓰인 저주를 풀 수 있다고. 오이디푸스는 맹세한다. 그 살인자를 반드시 찾아내 엄벌을 내리겠노라고. 그런데, 오이디푸스가 대면하게 되는 진실은 차라리 듣지 않았으면, 보지 않았으면 좋았을 최악의 경우였다.
황정민은 ‘오이디푸스’가 무대에 오르기 전 가진 간담회에서 “이 작품은 연극을 공부하는 연극쟁이에겐 최고의 작품이다.”고 말했다. 작품의 전체적 구성은 물론이며, 각 캐릭터들의 역할, 캐릭터간의 상호작용, 그리고 결과에 이르기까지 차곡차곡 쌓여가는 갈등과 불안감이 완벽하다. 물론, 오이디푸스의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인간의 숙명, 원죄 등 복잡한 숙제를 던져놓는다.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은 ‘연극쟁이’뿐만 아니라 이후 창작자와 독자에게 심오한 사유의 공간을 남겨놓은 것이다.
단순하게 보자면, 순수한 마음의 오이디푸스가 ‘몰랐던 사실’을 기어이 알고자 하면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하지만, 오이디푸스는 혈기방장한 청년이었고, 진중하지 못한 처신을 했으며, 너무 쉬이 맹세를 하고, 그 말에 속박되는 인간의 가벼움을 보여준다. 오이디푸스는 끔찍한 신탁을 들었음에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처사나 자신의 주위를 의심하거나, 신중하거나 한발자국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관객들은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2500년 전부터 펼쳐졌을 인간고뇌의 무게감과 작품의 깊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90분 내내 소리 지르고, 고뇌하고, 눈물 흘리는 황정민의 열연과 ‘어느 순간’ 최악을 예감한 배해선(이오카스테), 그리고 그런 최악의 순간을 조금씩 직조해 나가는 많은 캐릭터들이 연극 ‘오이디푸스’를 25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인간의 이야기로 완성시킨다.
지난 달 29일 개막한 연극 <오이디푸스>는 황정민 등 모든 배우들이 원캐스팅으로 공연된다. 2500년 전 아마도 에게의 푸른 바다가 내다보이는 아테네의 극장과 다른 점은 무대디자인과 장치, 그리고 단조롭지만 폐부를 파고드는 음악일 것이다. “발아, 내 발아 나는 어디로 가야하는가”라고 외치며 피눈물을 흘리는 황정민을 보려면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으로 달려가시라. 이달 24일까지 공연된다.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