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사서(史書)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양귀비’(楊貴妃)는 절세가인, 미인의 대명사로 손꼽힌다. 양귀비는 중국 당나라 시절 인물이다. 안녹산의 난 때 죽었으니 1300년 전 사람이다. 양귀비는 호리호리/하늘하늘한 타입이 아니라 꽤나 풍만한 생김새로 사료된다. 양귀비는 우리나라 춘향이만큼 유명한지라 중화권에서는 수도 없이 영화로, TV드라마로 만들어졌다.(그 전에는 천년 동안 시로, 그림으로 추앙되었고 말이다.) 양귀비의 이야기를 담은 최신작품이 개봉된다. <패왕별희>를 만든 천카이거 감독의 신작 <요묘전, 레전드 오브 더 데몬 캣>이다. (요망할 ‘妖’, 고양이 ‘猫’이다)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선 당나라 역사와 양귀비에 대해서 좀 알아 둬야할 것 같다.
중국에서 유일무이 여황제 천무후의 시대가 지나고 현종이 치세할 시절 당은 그야말로 태평성대, 지구상 최강의 제국이 되어있었다. 현종이 총애해 마지않던 왕비인 무혜비(武惠妃)가 죽은 뒤, 그의 주위에는 3천 여인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 모든 경쟁자를 올킬한 여인이 바로 양귀비이다. '귀비'가 되기 전에는 옥환(玉環)이라고 불리었단다. 원래 옥환은 현종의 18번째 아들 이모(李瑁)의 처였다. 즉, 황제의 며느리였다. (현종에게는 아들이 23명, 딸이 29명 있었다) 한국이나, 중국이나 궁중극은 환관과 외척, 미녀들이 등장하는 피바람 휘몰아치는 권력싸움이 대부분이고, 그 중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막장요소이다. 어쨌든 현종은 남들 보기가 민망한지 일단 옥환을 절(불교가 아니라 도교사원)로 보냈다가 시간이 좀 지난 뒤 다시 불러 정식 비로 삼은 것이다. 그렇게 양옥환은 귀비가 된다. 양귀비!
중국 역사 이래 정치,군사,외교,문화적으로 최고의 수준에 다다랐던 당(唐)도 여기저기에서 금이 가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기회를 엿보던 안녹산(과 사사명)이 거병하여 장안(당시의 수도)을 향해 몰려온다. 그동안 양귀비의 치마폭에서 태평성세를 누리던 현종은 화들짝 놀라 서쪽으로 도망간다. (임진왜란 때의 선조, 병자호란 때의 인조처럼)
도망가다가 마외역(馬嵬驛)이란 것에 이른다. 그나마 따르던 병졸과 백성들이 결국 들고 일어난다. 나라가 이 사단이 난 것은 ("나라님 때문이야"라고는 말 못하고, 보필을 잘못한) 양국충(楊國忠)을 죽이라는 것이다. 양국충은 양귀비의 외척으로 ‘나라를 그 지경에 만드는 데 혁혁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양국충의 목은 날아간다. 하지만 백성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고 이번엔 양귀비도 죽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현종은 마지못해 그러라한다. 환관 고역사가 비단을 넘겨주었고 양귀비는 그걸로 목을 매 숨을 거둔다. 자결한 셈이다. 그렇게 마외역에서 양귀비는 죽고, 이후 안녹산의 난은 평정된다. 현종은 살아남았고 말이다. 드라마틱한 역사의 순간들이 이어진다.
절세미녀 양귀비와 현종과의 로맨스, 안녹산의 난, 안녹산가 양귀비의 에피소드 등이 파고들면 들수록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쏟아진다. 그리고 그들 주위에는 이백(이태백), 두보 등 최고의 문장가들이 즐비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후 수많은 문장가들이 양귀비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이 이야기를 일본의 작가 유메마쿠라 바쿠가 자신의 <음양전>시리즈에서 다뤘다. 일본 땅에서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를 해 주던 작가는 양귀비 이야기를 어떻게 풀었을까. 양귀비의 죽음에 알려지지 않은 비극이 있다고 전해준다. 중국의 황제가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장안에 말을 하는 고양이가 나타나는 등 별 일이 다 생기자 일본의 명승 쿠가이(空海선사)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장안에 당도한다. 그는 궁궐의 관리 백낙천(백거이)과 손을 잡고 사건을 파헤쳐가기 시작한다. 양귀비의 죽음과 원한 맺힌 고양이의 비밀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중국문학에서 양귀비를 다룬 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이백의 ‘청평조사’(淸平調詞)와 백거이의 ‘장한가’(長恨歌)이다. 이백과 백거이가 이 작품에 등장한다.
현종이 양귀비에 포옥 빠져있을 때 ‘환락지연’이라는 대규모 연회를 연다. 주야장천으로 이어지는 술과 춤, 그리고 마술의 향연이 궁궐 사람뿐만 아니라 장안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든다. 당대 최고의 시인 이백(이태백)도 그 자리에 끼었다. 술에 엄청 취해 있을 때 고역사가 왕명을 전달한다.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시로 쓰라는 것이다. 이백이 술에 취해 일필휘지로 써 내린 게 바로 ‘청평조사’이다. 첫 구절이 영화에 등장한다.
雲想衣裳花想容 (운상의상화상용)
(구름은 그대 의상 꽃은 그대 얼굴)
영화에서 일본승려 쿠가이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는 관리가 바로 백거이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양귀비를 흠모하였기에 양귀비의 죽음을 쫓는데 헌신하고, 양귀비와 현종의 아름다운 로맨스를 자신을 일생의 작품으로 남기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남긴 것이 ‘장안가’이다.
중국인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고, 아직도 회자되는 문학작품들이기에, 그런 작품을 한번 찾아보고 영화를 보면 더 재미있을 것이다. 천카이거 감독은 그런 문학성에 더하여 영화적 환상, 판타스틱한 영상미학으로 환락지연의 황홀함을 극대화시킨다. 천카이거 감독은 조르주 멜리에스의 이야기를 담은 마틴 스콜세시의 <휴고>를 떠올리게 할 만큼 환상과 마술, 환각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천카이거와 장이머우는 ‘중국 5세대 감독’으로 추앙받았다. 장이머우 감독이 ‘뻥과 과장’의 영상미학 감독이라면, 천카이거는 장대한 중국역사에서 문학적이면서, 환상적인 순간을 박제하는데 수완이 있다.
백거이를 연기한 배우는 황헌이고, 쿠가이는 일본배우 소메타니 쇼타이다. 가장 눈이 가는 양귀비를 연기한 배우는 장용용(張榕容, 샌드린 핀나)이다. 대만배우이다. 서구적인 외모가 눈에 띌 것이다. 아버지가 프랑스인, 어머니가 대만사람이란다. 지난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에 열린 ‘캐스팅보드’ 행사 때 부산을 찾은 적이 있다.
양귀비와 그 시절의 당나라에 매료되었다면 판빙빙 등 여러 여배우들이 거쳐 간 양귀비 영화를 찾아볼지 모르겠고, 중국여행을 한다면 양귀비가 목욕했다는 화청지와, 양귀비가 묻혀있다는 묘를 찾아가볼지 모르겠다. 1300년이 지나도 그녀를 기억하다며, 이런 영화를 보고도 여전히 양귀비가 신비롭다면 말이다. 유메마쿠라 바쿠가 ‘음양사’에 양귀비 이야기를 한 것처럼, 일본에서도 ‘양귀비’ 전설이 많다. 이유 중의 하나가 양귀비가 안록산의 난 때 죽은 게 아니라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물론, ‘엘비스 프레슬리 생존설이나 히틀러 도망설’ 같은 이야기지만 창작자에겐 영감을 주는 이야기이다. 갑자기 이 영화를 소개하는 것은 8월 30일, 한국에서 개봉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선 지난 연말에 개봉되었다.(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