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과 <미드소마>라는 유별난 영화로 호러영화팬을 도전의식을 자극한 아리 애스터 감독이 신작 <보 이즈 어프레이드>(원제:Beau Is Afraid)를 들고 한국을 찾았다. 이 영화는 지난 주 개막한 부천국제판타스틱(BIFAN) 개막작으로 상영된 후, 곧바로 극장에서 개봉됐다. 언젠가부터 한국을 찾는 해외 영화인들은 한국의 영화감독 이름을 나열하며 ‘좋아한다’, ‘존경한다’, ‘흠모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이제 거의 관례가 된 듯하다. 그런데 아리 에스터 감독은 봉준호, 나홍진과 함께 유현목, 김기영 감독 이름까지 거명하며 ‘K콘텐츠’에 심취했음을 숨기지 않았다. ‘오발탄’을 이야기하고 ‘김기영 감독’의 괴작을 들먹이다니. 놀랍다!
<보 이즈 어프레이드>는 무려 2시간 59분 영화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것이라 했다. ‘재밌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지루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주인공 ‘보’를 따라 겨우겨우, 힘겹게, 필사적으로 목적지를 향해가는 것이 흥미롭다.
영화의 첫 장면은 널리 알려진 대로 ‘보’의 출산장면을 신기한 앵글로 잡아낸다. 세상의 빛을 처음 보는 순간 세상의 소음 속에서 엄마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려온다. “맙소사, 아이를 떨어뜨린 것 아니에요? 아이가 왜 안 우는 거죠? 아이가 괜찮나요?” 그렇게 갓 태어난 자식에 집착하던 엄마와 한순간 울지 않던 아이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이 영화는 그 엄마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기영 감독이 그렸을 영화이고, 프로이드가 자문했을 영화이다.
다음 장면은 성인이 된 ‘보’(호아킨 피닉스)를 보여준다. 정신과 상담을 받고 있다. 말 하는 것이나, 행색으로 봐서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다. ‘타이거 맘’ 같은 엄마의 과보호 아래에서 자랐을 것 같은데, 빈민가 허름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다. 보는 지독한 편집증에 시달리는 것 같다. 어쩌면 온통 폭력적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아파트에 꼭 처박혀 자신만의 안전망을 치고 사는 듯하다. 하지만 그는 길을 떠나야한다. 아버지 기일에 맞춰 어머니(패티 루폰)를 찾아가기로 약속한 것이다. 하지만 여정은 순조롭지 않다. 강도와 도둑과 살인자와 미친놈으로 가득한 거리를 가로질러야한다. 그리고 먼저, 이 아파트를 빠져나가야한다.
보의 세상은 산부인과, 정신과, 폭력으로 가득한 거리, 열쇠와 문 하나로 겨우 안전을 보장 받는 아파트가 전부이다. 그 아파트를 벗어나는 순간 보는 완전히 미친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보의 시각일지 모른다. 세상은 평화로운데 그만 그렇게 인식하는지도 모른다. “아이쿠!” 한 순간에 차에 부딪친 보가 깨어났을 때는 또 다른 ‘미친 세상’이다. 로저와 그레이스 부부의 집이다. 그들의 딸 토니의 침대 위다. 그리고 슬프게도 어머니가 어이없는 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화로 듣게 된다. 이제 ‘보’는 아버지 기일도 못 맞추고, 엄마와의 약속도 못 지킨 불효자로서, 상처투성이 몸을 이끌고 엄마의 장례식장으로 향한다. 물론, 가는 길에 상상도 못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도착해서는 꿈도 못 꾸던 일들을 겪게 된다. 그리고 그 뒤는 더 황당하다.
아리 에스터 감독은 <보 이즈 어프레이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보’는 태어나기를 불행하게 태어났을 뿐 아니라, 어머니의 잘못된 사랑과 훈육을 받은 것 같다. 흔히 말하는 ‘편집증’(偏執症, Paranoia)의 뜻은 현실세계의 현상, 사건과는 동떨어진 망상을 진실로 믿고 이에 집착하는 정신증의 일종이란다. 여태 보의 여정을 따라온 관객이라면 누군가가 그런 망상장애를 앓고, 자신의 세상에 사로잡혀있음을 알게 된다. 보가 생각하는 폭력적 세상도, 보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죽음도, 보가 만났던 ‘엘레나’와의 인연도 모두 그런 정신상태 아래서의 인식일 것이다.
보와 함께 하는 여정에서 관객을 ‘물’을 자주 만나게 된다. ‘약은 꼭 물과 함께 먹어야 한다’는 의사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위험천만한 질주를 하게 된다. 그가 처음 그 난장판의 거리를 지날 때 한 소년이 분수대에서 장난감 배를 갖고 놀고 있었다. 그 아이의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곁에 있어랬더니!”하며 끌고 간다. 분수대 배는 뒤집어진다. 그 아이와 그 엄마처럼, 보의 운명도 정해진 듯하다.
아리 에스터 감독이 10년 이상 공력을 들인 시나리오에는 감독의 괴이한 감성과 악취미, 그리고 미학이 넘쳐난다. ‘보’가 집에서 먹는 냉동 패스트푸드, TV에서 나오는 광고, ‘토니’의 방에 보게 되는 포스터들은 모두 그런 감독의 디테일한 집착의 결과물일 것이다.
영화는 어렵고, 혼란스럽고, 지루할 수 있지만 확실한 것은 ‘보’의 상태에 대한 동정이다. 보는 엄마 말을 고분고분 따르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 안 주고 오직 정해진 길로만 가려고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고, 가족은 적절한 도움을 주지 않았다.
누구의 잘못일까. 아버지 육신의 문제? 어머니 정신의 문제? 보 자신의 나약함? 아니면 관객들의 잘못된 선택일까. 보가 갖고 있는 공포심의 근원은 애초 잘못 입력된 정보 탓일 것이다. ‘죄책감’도 가질 필요 없는, 그런!
▶보 이즈 어프레이드 (Beau Is Afraid) ▶감독: 아리 에스터 ▶출연:호아킨 피닉스, 패티 루폰, 네이단 레인, 에이미 라이언, 카일리 로저스, 스티븐 헨더슨, 데니스 메노쳇, 파커 포시 ▶2023년7월5일/ 179분/ 청소년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