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나의 해방일지>로 ‘추앙받는 구씨’ 열풍을 일으킨 손석구 배우가 무대 위에 섰다. 손석구는 드라마, 영화, 넷플릭스 작품뿐만 아니라 단편영화 연출까지 나선 다재다능한 배우이다. 그가 <사랑이 불탄다>(2014) 이후 오랜만에 선택한 작품은 연극 <나무위의 군대>이다. 지난 20일부터 마곡나루에 새로 세워진 LG아트센터서울 U+스테이지에서 팬들을 만나고 있다. 연극 <나무 위의 군대>는 일본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의 작품이다. 소설가/극작가/방송작가인 이노우에는 반전, 반핵을 외치던 양심적 작가이다. ‘패전국 일본’에 대한 작가적 양심으로 준비했던 작품 중 하나가 ‘나무 위의 군대’이다. 2010년 작가는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그가 준비하던 원고를 바탕으로 2013년 처음 무대에 올랐다. 우리나라에서도 2015년 연극열전 라인업으로 공연된 적이 있다.
<나무위의 군대>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1945년 그들의 ‘대동아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일본 제국군인의 이야기이다. 배경은 일본 남쪽 오키나와이다. 막바지에 몰린 전쟁. 미군의 공세에 일본군인 둘이 쫓기듯 무성한 나무 위로 숨어든다. 그들은 숨을 죽인 채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친다.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핵폭탄이 떨어지고, 천황이 항복했음에도 이들은 알지 못한다. 낮에는 나무 위에 숨어있고, 밤이면 몰래 내려와 먹을 것을 찾아 헤매는 ‘그들만의 전쟁’이 2년간 지속된다. 야마구치 시즈오와 사시다 슈우준이었다. 그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았고, 무엇으로 버텨내었으면,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차례로 미군의 핵폭탄이 떨어지고, 일본은 항복한다. 이때 이른바 ‘쇼와 덴노의 옥음(玉音)방송’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다.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를 보면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항복선언을 하는 것을 듣는 장면이 있다. 그럼,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치르던 전장의 일본군인들은 어떻게 항복을 받아들일까. 저 멀리 버마(미얀마)에서, 필리핀에서, 인도네시아에서, 오키나와에서 일본군은 싸우고 있었다. 전우들은 다 죽고 고립되어, 뿔뿔이 흩어져 정글로, 동굴로 숨어들어간 패잔병들 말이다. ‘나무 위의 군대’의 두 군인은 그런 신세이다. 건빵 조금과 총만 집어든 채 나무 위에 숨는다. 상황 설명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전쟁의 중심, 폭격의 중앙이었다. 미군은 본토 공격을 위해 오키나오를 점령해야했고, 일본은 오키나와를 최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다. 오키나와는 불타고, 오키나와 사람은 죽어나갔다. 나무 위에 숨은 두 군인은 미군 기지가 세워지는 것을 지켜만 보는 것이다. 언젠가 지원군이 도착하여 미군을 몰아내고, 오키나와를 지키고, 일본을 수호하고, 천황을 보필하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하다.
물론, 처음엔 그랬다. 상관은 그런 식으로 부하를 훈육한다. 먹을 것을 최대한 아껴먹고, 절대 들키지 말도록 정숙을 유지하며, 언제 전투에 나가더라도 싸울 수 있게 총을 닦고 준비하라는 것. 그런데 어리바리하던 부하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진다. 처음 나무 위로 올라올 때 나무 밑에는 전사한 동료의 시체가 즐비했고,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그런 상황도 익숙해지더니 몰래 나무를 내려와 먹을 것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대범하게 쓰레기더미에서 미군이 내다버린 것들도 수거하기 시작한다. ’양키의 풍요로움‘이라니. 상관은 처음에는 ’적국의 음식을 먹다니!‘였지만 어느새 살아남기 위해, 살다보니 적응이 된다. 피골이 상접했던 그들도 어느새 풍수가 좋아진 듯하다. 그들이 언제까지 그렇게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어느 날 ’항복권유 삐라‘를 주워들고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일까. 나무위의 군대, 두 명의 전사들은 또다시 전술적 논쟁과 철학적 한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나무위의 군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오키나와에 대한 인식이 필요할 것이다. 지금의 오키나와는 하와이 같은 관광지, 혹은 미군의 점령지(?)쯤으로 이해될지 모른다. 오래 전 류구였던 이 독립왕국은 일본의 땅이 되었지만 오랫동안 ’2등 신민‘의 신세였다. 작품에서 상관과 부하는 ‘이 땅을 지킨다’는 의미에 대해 조금은 다른 인식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상관은 본토 출신이었고, 부하는 오키나와 현지인이었다. ‘내 땅’을 지키는 것과 ‘내 조국을 수호한다’의 범위에 대해서, 그리고 그 방식에 대해서 인식의 차가 있다. 부하 입장에서는 평화로운 자기들 마을에 어느 날 일본제국군이 들어오고, 미군이 쳐들어오고, 총질하고, 불사르고, 주민들을 내쫓았던 것이다. 물론, 2차 대전의 전황(오키나와 전투)이나 오키나와 원주민의 위상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벼랑에 몰린 전장의 군인의 딜레마는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왜 이러고 있지?’와 ‘저 놈만 죽이면..’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실제 일본 천황의 항복 이후에도 ‘항복’을 몰랐던, 혹은 받아들이지 못하던 많은 제국주의 군인들이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항복을 인정하지 못하고 20년간 자기만의 전쟁을 치른 군인(히로 오노다 중위)이 있었고, 전쟁이 끝난 것도 모르고 수십 년을 밀림 속에 숨어살았던 군인들의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이노우에 히사시가 전하고자 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천황과 제국군인들의 얼빠진 제국주의를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물정 모르고 상황극을 벌이는 낙오자들의 블랙코미디일까. 작품은 거대한 역사 속의 미약한 인물을 다루면서 피날레를 맞는다.
극에는 단지 세 명의 배우만 등장한다. 상관과 부하, 그리고 상황을 설명하거나, 대화의 깊이를 책임지는 숲의 정령, ‘여자’이다. 무대를 가득 채운 것은 커다란 나무이다. 관객의 가시성을 위해 무성한 나뭇가지는 제거되고 단단하게 꼬인 나무줄기가 두 군인의 동선을 극대화 시킨다. 이런 제한된 공간에서 세 명의 배우들이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김용준, 이도엽 배우가 상관으로 교대로 출연하고, 손석구가 부하로, 최희서가 숲의 정령을 연기한다.
반전과 반핵, 일본 평화헌법 수호를 지지한 이노우에 히사시는 나무 위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전해주려 했을까. 그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평화의 이야기일 것이다.
참, 두 군인이 올라갔던 나무는 가쥬마루( 반얀/榕樹/Ficus microcarpa) 나무이다. 줄기와 뿌리가 엄청나게 뻗어나가는 수종이다.
<나무 위의 군대>는 8월 5일까지 LG아트센터서울 U+스테이지에서 공연된다.
[사진=LG아트센터/엠피앤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