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사고의 현장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디선가의 작은 움직임이 모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경우가 있다. 데, 그 모든 것이 수월하게, 발생과 동시에 전달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 5월의 광주가 그러했다.
1979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이 심복의 총탄에 쓰러지며 유신의 세월은 막을 내리지만 곧바로 또 다른 군부실력자가 정권을 장악하고, 서울의 봄은 얼어붙는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함성은 광주에서 크게 터진다.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들은 거리로 몰려나왔고 그들의 목소리는 금남로를 뒤덮는다. 그리고 비극은 시작된다.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리는 역사이다.
오늘날처럼 인터넷도, 1인 미디어도 없던 그 때 광주의 실상은 완전히 차단된다. 당시 현지의 언론인들은 좌절하고, 서울의 언론은 입을 닫았다. 그때 정말 ‘부끄럽게도’ 외국 언론매체가 광주로 눈을 돌렸다. 그중에는 일본 동경에 있던 독일방송사 저널리스트도 있다. 한국으로부터의 불온한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곧장 서울로 날아왔고, 택시를 타고 광주로 달려간다. 장훈 감독의 <택시 드라이버>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그 외국인 기자이다. 서독 ARD소속 방송국인 북부독일방송의 텔레비전 카메라맨 위르겐 힌츠페터(Jürgen Hinzpeter, 1937~2016)이다. 그의 이야기는 2003년 5월 18일, KBS스페셜 <80년 5월 푸른 눈의 목격자>로 소개되었다.
<택시운전사>로 다시 한국인에게 그의 존재를 알린 위르겐 힌츠페터가 올 5월에 다큐멘터리로 다시 돌아왔다. <푸른 눈의 목격자>를 연출했던 KBS 장영주 피디가 방송에서 다 못다 보여준 그의 이야기와 그가 간직하고 있었던 광주의 기록물을 모아 를 완성한 것이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드라마틱하게 (김사복의 택시를 타고) 광주에 잠입한다. 그는 광주 시민들 사이에서 광주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나중에 군사정부와 그 꼭두각시 방송과 언론에서 ‘폭도들 때문에 아비귀환이 되었다’는 광주의 모습이 컬러 필름에 고스란히 담긴 것이다. 그가 찍은 필름은 가까스로 서울을 거쳐 일본으로 반출된다. 당시 한국의 모든 언론이 귀와 눈을 닫고, 군부의 입이 되어 있을 때 힌츠페터의 영상은 독일뿐만 아니라 세계로 전파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 영상이 한국으로 몰래 들어온다. 1980년대 중반부터 대학가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면 몰래 상영되었던 바로 그 광주 동영상이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카피되면서 더욱 비장미를 더한 광주시민의 외침과 주검들, 그리고 그 분노는 대한민국 민주화의 굳건한 자양분이 되었다.
‘위르겐 힌츠페터’는 베트남전쟁 때도 카메라를 들었었다. 광주의 참상을 직접 카메라에 담았던 그는 이후 한국 민주화투쟁의 현장을 지켜봤다. 1986년 광화문 시위현장을 찍다 사복경찰들에게 노상에서 집단구타를 당한다. 목뼈와 척추를 다치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그렇게 한국을 떠났고, 기자를 그만 둬야했다. 힌츠페터는 투병 끝에 2016년 1월 25일, 향년 79세를 일기로 독일 북부의 라체부르크에서 타계했다. 힌츠페터가 생전 사랑했던 한국을 그 부인도 몇 차례 방문했다. 남편이 사랑했던 그 한국을, 그 광주를, 그렇게 소망했던 한국 민주화의 모습을 보고, 확인하기 위해서.
이번 다큐에서는 독일의 힌츠페터 묘지에 놓인 꽃을 보여준다. 그 날의 광주의 실상을 필름에 담아 세상에 진실을 알려준 님에 대한 고마움이 남아있다. 힌츠페터의 생전 소망에 따라 그의 손톱과 머리카락이 그를 기리는 비석과 함께 광주 북구 망월동 옛 5ㆍ18묘역에 안치되어있단다. 영면을 기린다. 5월 17일 개봉/12세관람가 (KBS미디어 박재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