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12시 10분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임상수 감독의 <파로호>가 시청자를 찾는다. ‘그때 그 사람들’과 ‘하녀’의 그 임상수가 아니다. 동명이인의 신인감독이다. <파로호>는 작년 극장에서 개봉된 신인감독 임상수의 장편영화 데뷔작이다. 늦은 밤, 시청자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 독립영화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높은 산들이 둘러싼 저수지를 보여준다. ‘파로호’이다. 이곳 외진 국도변에 작고, 낡은 모텔이 있다. 도우(이중옥)는 이곳 모텔의 주인이다. 손님은 거의 찾지 않는다. 장사도 안 되고, 노총각으로 늙어가는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치매 걸린 모친(변중희)이다. 지난 5년간 수발을 들며 그도 골병이 들어가고 있다. 그의 하루는 이럴 것이다. 밤새 카운터 책상에 엎드려 비몽사몽 잠이 들었다가 어디선가 아련하게 벨소리가 들린다. 저쪽 방에서 엄마가 신경질적으로 아들을 부르는 벨소리이다. 도우는 아침부터 모텔 룸과 복도를 청소한다. 그런데 불길한 느낌. 객실 손님이 목을 매고 자살했다. 경찰이 온다. 벌써 세 번째란다. 늙은 모친의 치매는 더욱 그의 신경을 긁는다. 안정제라도 왕창 먹어야 잠이 들 것 같다. 아니면, 그 약을 먹고 죽어버리는 게 나을 듯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렸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엄마가 사라졌다. 그리고, 어디선가 강아지 한 마리가 배회한다. 도우는 그 강아지를 옆에 두고, 외로움과 고통스러움을 애써 달랜다. 엄마는 보이지도, 돌아오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수군거린다. ‘병수발에 지친 아들이 죽였을 것’이라고. 그 모텔에 정체불명의 남자 호승(김대건)이 머물기 시작하고, 동네 다방 종업원 미리(김연교)가 가끔 쉬려고 찾아온다. 도우는 점점 현실과 악몽이 모호해진다. 약기운은 더욱 혼란을 가중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해하려는 것 같고, 자기가 누군가를 죽인 것 같다. 알 수 없다.
외진 곳의 낡은 모텔 주인 도우를 연기하는 배우는 이중옥이다. 화면에서 더욱 왜소해 보이는 이중옥은 자신에게 던져진 고통을 묵묵히 감수한다. 아무리 열심히 청소하고, 관리하여도 모텔 계단은 삐걱거리고, 금이 간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이런 을씨년스러운 모텔에는 손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고, 어쩌다 있는 손님마저도 ‘치매 걸린 엄마’의 끔찍한 고함소리에 나가버린다. 그런 도우에게 그나마 위안을 주는 것은 읍내 헤어샵의 혜수(강말금)이다. 혜수는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남편 때문에 도우 못지않은 삶의 무게에 짓눌러 살고 있다.
영화 <파로호>는 충분히 짐작 가는, 이해할만한 도우의 정신적 고통을 그린다. 2층 방의 저 남자는 무언가 숨기는 것 같고, 헤프게 웃는 듯한 여자는 자기를 조롱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이것이 도우의 꿈인지, 환상인지, 과거인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저 사람이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누군가가 엄마를 죽인 것 같고, 강아지를 유기한 것 같다. 도우는 그 모텔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다.
‘파로호’는 강원도 춘천의 북쪽, 화천에 있다. 한국전쟁이 끝나갈 무렵 인해전술로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을 이곳에서 몰아넣어 수장했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져 온다. 하지만, 파로호의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오래된 유령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대부분 곡성과 담양에서 촬영된 모양이다.
도우의 혼란스러운 상태가 <파로호>를 끝까지 보게 만든다. 아마 조진웅의 <해빙>이나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더 큐어>, 그리고 박홍민 감독의 작품들을 인상 깊게 본 영화팬이라면 이 영화의 모호함과 흐릿함에 매료될 듯하다.
▶파로호 ▶감독:임상수 ▶출연: 이중옥(도우) 김대건(호승) 김연교(미리) 변중희(어머니) 강말금(혜수) 공민정(형사) ▶개봉:2022년 8월 18일 상영시간:100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