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영화와 관련된 법률에 시나리오 심의제도란 게 있다. (우리나라도 있었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당국의 승인을 받아야하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영화를 해외영화제에 출품하려면 완성된 작품을 다시 승인받아야 필름을 반출할 수 있다. 창작자들은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서 해외에 자기들의 작품을 공개하기도 했다. 지아장커나 로우예 감독이 그러했다. 이들 감독의 작품은 대체로 “자본주의의 물결에 휩쓸린 인민들이 겪는 극도의 불행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중국은 이들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며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했다. 즉 ‘국가의 위신’이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법으로 저지한 것이다. 어제(8일) 개봉된 우리영화 <다음 소희>를 보면서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다음 소희>는 여러모로 손상당할 것이 많은 영화이다. 관련되는 사람, 기관, 단체 등등은 뼈저리게 반성하시길.
영화 <다음 소희>는 2017년 1월 22일, 전라북도 전주의 아중저수지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 고교졸업반 홍은주(가명)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다. 은주는 졸업을 앞두고 우리나라 거대통신사 산하 하청업체의 콜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했다. “통화하기 왜 이리 어려워!”, “해지한다니까”, “딴 상품 관심 없어”, “해지하겠다는 데 왜 그리 말이 많아!” 식의 전화를 계속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회사 팀장으로부터,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압력을 받았을 것이다. <도희야>의 정주리 감독은 그렇게 실습생 잔혹사를 영상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꿈 많은 열여덟 소희(김시은)가 춤 연습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마치 걸그룹 멤버인 것처럼 열정적으로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뛰고, 구르고, 돌고, 앉았다 일어선다. 그런데 매번 한 동작에서 스텝이 꼬인다.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소희는 학교 추천으로 콜센터에 실습을 가게 된다. “대기업이야!”, “학교 취업률이 올라야 우리학교도 살아남지!” 같은 선생님의 채근을 듣고 출근을 시작하지만 소희의 환상은 곧바로 깨어진다. 관객들은 꿈 많고, 자기주장에 거침없던 소희가 점점 위축되고, 고립되고, 절망하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그리고 소희는 결국 슈퍼에서 맥주를 혼자 마시다가 한줄기 햇살을 바라보고는 저수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오유진 형사(배두나)가 그 사건의 흔적을 하나씩 따라간다. 소희가 왜 그랬는지, 무엇이, 어디가, 누가 잘못했는지를 따지기 시작한다.
‘은주’의 비극은 SBS <그것이 알고 싶다>와 프레시안의 허환주 기자의 기사와 책(<열여덟, 일터로 나가다>) 등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물론, 그때만 잠깐 분노하고, 슬퍼하고, 클릭하고는 쉽게 잊는다. 정주리 감독은 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어, 다시 한 번 분노하고, 슬퍼하라고 말한다. 시청자는, 독자는, 관객은 사건의 흐름을 안다. 연관된 당사자가 문제점을 인식하면서도 주저하는 사이, 은주 같은 희생자가 양산된다는 것을. 학교가, 기업이, 나라가 잘못한 것이다. 젊은이들이 청운의 꿈을 펼칠 수 있게, 사회의 일원으로 안전하게 안착할 수 있도록 튼튼하고, 신뢰할 만한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할 것이다. 지금 ‘학교의 위신’이나 ‘국가의 체면’이 문제가 아니다. ‘다음 번 소희’의 일이다. 사람의 일이다. by. 박재환
▶다음 소희 ▶감독:정주리 ▶출연: 배두나 김시은 ▶2023년 2월 8일 개봉/ 138분
[사진=트윈플러스파트너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