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아
태국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의 작품을 극장에서 만난다. 감독은 2004년 [열대병]으로 칸 심사위원상, 2010년 <엉클 분미>로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작년, <메모리아>로 다시 한 차례 칸 심사위원상을 받았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태국에서 더 이상 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말하고선 놀랍게도 콜롬비아에서 이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 영화를 극장 말고는 유통시키지 않겠다고 말했다. 품팔이 하듯이 순회하며 극장에서만 상영하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 영화는 정식 수입되어 한국의 극장에서 선보이게 되었다. OTT나 DVD로는 당분간 만나보기 어려울 것 같으니 꼭 시간 맞춰 극장으로 달려가 주시길. 물론, 이 영화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가장 좋아할 영화라는 점만 미리 알아두시길. (그만큼 난해하거나, 고품격이라는 소리일 것이다)
제시카(틸다 스윈튼)은 한 밤에 곤히 잠을 자다가 어떤 큰 소리에 잠을 깬다.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를 분명 들었다. 창밖을 내다보니 짙은 어둠 속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마치 세상에서 그 큰소리를 혼자 들은 듯하다. 아니면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인지 모른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제시카는 지금 콜롬비아에 와 있다. 보고타에 입원한 여동생을 찾아간다. 침대 머리맡에서 동생과 함께 오래 전 버려진 개, 죽어가는 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제시카는 이곳에서 꽃(화훼) 관련 일을 하고 있다. 제시카는 몇 번 더 ‘커다란 소리’를 듣게 되지만 다른 사람은 반응이 없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제시카는 에르난(후안 파블로 우레고)이라는 사운드 엔지니어를 찾게 된다. 제시카는 자신이 들었던 소리에 대해 형용하기 시작한다. “펑!” 그러고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커다란 콘크리트공이 어딘가에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 같았다고. 금속성의 그 소리가 울리는 곳은 지구중심부 같았다고 말한다. 얼마 뒤 다시 찾아간 에르난. 그런데 그런 사람은 없다고 한다. 뭔가 기이한 경험. 밴드 연주를 가만히 지켜보다 정처 없이 산길을 걷다가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의 이름도 에르난(엘킨 디아즈)이란다. 그는 생선을 손질하고 있었다. 이 남자는 세상의 소리를 다 듣고, 다 기억하고 있단다. 돌멩이에서 남은 오래된 소리의 진동을 알아차린다. 그는 소리(몸에 남은 진동)와 그 존재들을 연결하는 방법(기억)을 알고 있었다.
메모리아
영화 ‘메모리아’는 ‘닥터 스트레인지’에서 영적인 존재 ‘에이션트 원’을 연기한 틸다 스윈튼의 설명하기 어려운 ‘콜롬비아 삶’을 따라간다. 분명 제시카가 들은 소리를 관객도 들었다. 제시카는 병원에서 동생을 만나고, 우연히 그 병원에서 진행하는 발굴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게 된다. 터널 공사장에서 발굴된 오래된 유골을 본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아픈 동생의 과거? 땅속에 파묻힌 원주민에 가해진 가혹한 역사? 스코틀랜드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여정? 혹은 꽃에 묻은 균에 중독이라도 된 것일까? 이 영화는 친절한 설명이 없다. 제시카가 보는 것, 듣는 것, 그리고 만나서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작은 돌파구를 찾을지 모른다. 에르난과의 만남은 ‘기억의 저장장치’와 ‘안테나’의 역할이란다.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적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의 이야기이다. 어쩌면 에르난은 젊은 에르난의 또 다른 모습, 나이든 미래의 모습일지 모른다.
마지막에 제시카는 문득 하늘을 본다. 저 멀리 숲속에서 뭔가가 움직인다. 외계 우주선이 정글에서 하늘 높이 치솟더니 ‘팡’ 하는 소닉붐을 일으키며 저 멀리 날아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에 대해 이렇게 평을 했단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감독은 영화관을 성당으로 만들고 아피찻퐁 위라세타꾼 감독은 영화관을 법당으로 만든다"고. 적절한 것 같다. 선문답은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법이다. “펑!”
▶메모리아(Memoria) ▶감독: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출연; 틸다 스윈튼, 2022년 12월 29일 개봉/13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