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소개된 한국영화 가운데에는 ‘2022년, 작금의 대한민국’을 실감하게 하는 날이 선 영화가 대거 포함되었다.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을 통해 소개된 김태훈 감독의 <빅슬립>도 그 중 한 편이다. 한국영화의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것은 OTT와 거대자본의 스펙터클함이 아니라, 우리네 삶의 고통과 문제를 살뜰히 관찰하는 저돌성의 승리일 것이다.
● “17살이면, 네 인생 네가 사는 거지. 방법을 찾으라고, 방법을... ”
서울 외곽의 한 동네. 기영(김영성)은 물류회사 직원이다. 지게차를 운전하고, 짐을 실어 나르는 30대 후반의 공장노동자이가. 어느 날 집을 나서는데 집 앞 평상에서 자고 있는 길호(최준우)를 발견한다. 밤새 추위에 새우잠을 자고 있는 그가 불쌍해서 하루 자기 집에서 재워준다. 길호는 가정폭력에 못 이겨 집을 나온 상태. 길호는 기영의 호의와는 달리 행동한다. 무리들과 어울러 빈집털이를 하고 있다. 기영은 아마도 자신의 어두운 과거가 떠올랐는지 길호의 보호막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기영의 회사 보스는 그에게 은밀하게 불법적인 일을 지시한다. 길호의 무리는 기영이 출근한 뒤 그의 집을 차지한다. 기영은 그런 길호와, 길호의 무리들이 같잖아 보이기도 하고, 불쌍해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화가 난다. 길호의 폭력적 아버지도, 회사의 부당한 지시도 화가 날 뿐이다.
‘빅슬립’은 무엇일까.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영화) 제목에서 따왔지만 그렇게 느와르 적이진 않다. 이 영화에서는 그야말로 ‘깊은 잠’을 의미한다. 두발 뻗고 잘 수 있는 편안한 잠을 말할 것이다. 찬호는 집이 무섭고, 학교가 싫다. 돌아갈 곳도 없다. 무리와 어울리면서도 그 무리가 싫다. 그래서 혼자 밤새 배회하다가 추운 겨울 밤, 어느 집 앞 평상에서 곤히 잠들었을 것이다. 기영의 형편도 매한가지이다. 지인도, 친구도, 삶의 의미도 없는 듯한 기영은 오직 엄마가 남겨놓은 화분에 물을 주는 것이 유일한 낙이다. 길호는 선뜻 잠잘 곳을 내어준, 친절을 베푸는 그 아저씨가 고맙지만 감사의 표현에 익숙하지 않다.
기영과 길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남일 뿐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이어질지가 이 영화의 힘이다. 사랑과 배려, 일상의 행복감이라곤 없는 길호가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어른 기영의 작은 관심과 깊은 배려로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찾게 된다. 두 배우가 툭툭 내뱉는 날 것의 대사들이 점점 영화의 온도를 높이면서 따뜻한 결말을 안겨준다.
김태훈 감독은 가정폭력의 희생자 학생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한다. 감독은 가출청소년을 위한 ‘탈학교 청소년들’에게 영화를 가르쳤단다. 예술강사로 일하기 시작할 때 수업시간에 잠만 자는 학생이 있었단다. 그 학생이 수업시간에 자는 이유가 ‘아버지가 무서워서 밤마다 집을 나가 밤길을 서성거리다가 학교에 와서 잔다’는 것이다. ‘가족의 울타리, 가족의 보호’란 것은 길호 같은 아이가 세상모르게 잠들 수 있는 그런 공간을 말하는 것이다. 단순하지만, 중요하다. 두발 뻗고 살아서 잠을 잘 수 있는 세상이 그렇게 어렵다니 말이다.
▶빅슬립 ▶감독/각본:김태훈 ▶출연: 김영성, 최준우, 이랑서(초은), 김자영(새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