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베이징동계올림픽이 개막하는 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임정환 감독의 [국경의 왕](2019)이 영화팬을 찾는다. 임정환 감독의 전작 ‘라오스’(2014)를 보았다면, 이번 작품 ‘국경의 왕’의 기묘함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완독’에 도전해 보시길. 영화에 대한 아주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전작 ‘라오스’에서 태국과 라오스를 배경으로 영화 찍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임 감독은 이번엔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그렇다고 홍상수식 이야기는 아니다. 차라리 왕가위가 찍었을 법한 ‘멀홀랜드 드라이브’에 가깝다.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은 등장인물의 이야기일 뿐이고, 영화는 결코 만들어질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임정환 감독은 등장인물의 등장과 퇴장, 엇갈린 만남을 이리저리 연결시켜 ‘끝내’ 한 편의 작품을 완성시킨다. 기이한 완성품이다.
** 스포일러 ** 영화를 보신 뒤 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1인2역의 혼란스러운 인물구성이 펼쳐집니다
영화는 유진(김새벽)이 폴란드의 공항에 도착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중 나오기로 한 친구가 없다. 전화로 ‘세르게이’ 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끊긴다. 그 때 캐리어를 끈 한 남자가 지나간다. (이 남자는 우크라이나로 떠나는 현철이다!) 유진 옆에서 수상한 한국인(정혁기, 박진수)이 수작을 건다. 친구의 빈 아파트에 도착하여 쓰러져 잠이 든 유진. 벨소리에 눈을 뜨니 공항에서 만났던 그 남자(세르게이)가 짐 배달을 온다. 길에서 만난 한 남자가 꽃을 전해 주며 “오늘 만난 사람은 낯선 사람이 아니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라는 이상한 말을 한다. 레스토랑에서 선배(조현철)를 만나 이야기를 하는데 옆자리에 세르게이와 원식이 앉는다. 둘은 뭔가 불법적인 배달 일에 대해 논의 중이다. 한편 동철(조현철)은 우크라이나에 도착한다. 지하철에서 친구 혁기(정혁기)를 만난다. 혁기의 아파트에 짐을 풀고는 잠이 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교회 목사(한국인)는 “정말 힘들 때 이 종을 딱 세 번만 울려라.”라며 작은 종을 준다. 현철과 혁기는 세르게이에게서 배달 일을 의뢰받는다. ‘안약’(가짜눈물)으로 포장한 신종마약인 듯하다. 현철과 혁기는 공기관에서 일하는 친구 정환(임정환)과 배달일의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그 ‘안약’을 눈에 넣어본다. 그리고 일은 더욱더 위험하게 흘러가기 시작한다.
● 낯선 길의 끝에서 만나는 꿈
여기까지가 ‘챕터1’에 해당하는 ‘국경의 왕’이다. 이어서 ‘국경의 왕을 찾아서’라는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같은 인물들이 나와 같은 이야기를 혼란스럽게 나눈다. 김새벽이 유럽을 찾아오고, 조현철이 유럽의 또 다른 나라를 여행한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대학 친구, 선후배들인 모양. 유럽에서 영화를 찍겠다고, 글을 쓰겠다고 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유럽여행 중에, 체류 중에 겪었던 이야기를 잠깐씩 한다. 북한말을 쓰는, 어쩌면 고려인인지 모르는 사람이 꽃을 준 이야기와 종 이야기를 한다. 유진(김새벽)은 “동철이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이 모두 죽는 이야기”를 쓸 것이라고 말한다. 동철(조현철)은 자신이 찍고 싶은 영화에 대해 말하며 “고민인 게 우리한테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영화 안에서 하려다보니 결말까지 어떻게 가야할지 모르겠어.”라고 말한다. ‘유령’을 만난 유진은 공동묘지를 찾아 누군가의 무덤에 꽃을 놓는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고 카메라를 오랫동안 응시한다.
[라오스]에 이어 다시 한 번 기이한 로케를 떠난 임정환 감독은 [국경의 왕]에 대해 “낯선 길에서 살아가고 있는 오래된 친구들을 생각하며,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좋은 사람을 만났던 기억, 좋은 영화를 만났던 기억을 담고 싶었다.”고 말한다.
영화를 보고나면 뭔가 흥미로운, 대단한 사건이 있을 것 같지만 인물의 혼란스러운 교차 등장으로 줄거리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두 번 보고, 세 번 보면 묘한 매력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전적으로 동유럽이라는 공간의 특수성, 그들이 꿈꾸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열정, 그리고 왜 그곳까지 흘러갔을지 궁금해지는 인물 때문이다.
감독은 친구들을 ‘규합’하여 유럽에서 힘들게 자신의 영화를 완성시킨다. 이번에 합류한 김새벽을 제외하고는 다들 [라오스] 영화작업의 연장선상이다. ‘러시아 마피아’ 같은 분위기의 세르게이를 연기한 박진수는 프로듀서였고, 연기도 한다. 북한 말투의 ‘꽃집 남자’와 ‘유령’을 연기한 임철은 동시녹음 담당이다. 은경을 연기한 이유진은 ‘스크립터’이다. 물론 감독 본인도 ‘정환’역으로 출연한다. 한국 독립영화 제작방식의 눈물겨운 현장이 느껴진다.
영화 마지막, 김새벽이 꽃을 둔 폴란드 공원묘지의 무덤은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1941~1996)의 무덤이다. 영상원 출신다운 임정환 감독의 라스트신이다. 영화음악으로는 비탈리의 샤콘느, 쇼팽 피아노곡, 그리고 슈베르트의 노래가 사용되었다. 음악조차 매력적이다.
▶국경의 왕 ▶감독/각본/편집:임정환 동시녹음:임철 포로듀서:박진수 ▶출연: 김새벽, 조현철, 정혁기, 박진수, 이유진, 임정환, 임철, 박상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