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에서 대중연예시상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시상식에서 선택된 사람은 감격에 겨워 인상적인 수상소감을 남긴다. 2005년 청룡영화상에서 [너는 내 운명]으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황정민의 수상소감도 오래 회자된다. 이병헌(달콤한 인생), 조승우(말아톤) 등 쟁쟁한 후보를 제치고 무대에 오른 황정민은 “(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멋진 밥상을 차려놔요. 그럼 저는 맛있게 먹기만 하면 되는 거 거든요. ”라고 말한다. 함께 고생한 스태프와 동료배우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이런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는 아주 문학적인 표현이다. 그런데, 그 대사를 통째로 갖다 쓰는 영화가 나왔다. 그것도 황정민 자신이.
“잘 차린 밥상” 영상이 나오고 곧 황정민 주연의 신작영화 [냉혈한]의 제작보고회 열리는 청담동 극장 상황이 펼쳐진다. ‘천만 흥행배우’ 황정민은 행사가 끝나자마자 매니저에게 오늘은 집에 가서 푹 쉴 거라고 말한다. 그리곤 혼자 귀가하던 중 집 앞에서 탑차를 탄 일당에게 납치당한다. 눈을 떠보니 다섯 명의 악당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내 이 상황은 몰래카메라도, 도를 넘은 유튜버의 장난도 아닌 실제 상황임을 알게 된다. 내일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납치범들은 번갈아가며 협박하고 폭행하고 위협하며 몸값을 요구한다. 충무로 최고의 밥상배우, 수많은 영화에서 호기롭게 주먹을 휘두르던 액션배우이기도 한 황정민이지만 이제 손발이 묶인 채,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신세가 되었다. 산속 아지트에는 황정민 말고도 납치된 사람(이유미)이 한명 더 있었다. ‘스타배우’ 황정민은 살아서 나갈 수 있을까. [인질]을 리얼 시추에이션 활극이다.
필감성 감독은 20년 넘게 충무로에서 영화의 꿈을 이해 달려온 중고 신인이다. [인질]이 그의 장편 데뷔작이라 하니 오랜 기다림 끝에 개봉한 기쁨이야 말할 수 없이 클 듯하다. 이 영화는 중국에서 실제 일어났던 연예인 납치사건을 모티브로 하고 있다. 2004년 연예인 우뤄푸(吳若甫)가 베이징에서 납치된다. 이 사건은 하루 만에 범인을 일망타진하고 그는 무사히 돌아온다. 이 사건은 2015년 딩셩(丁晟) 감독에 의해 [세이빙 미스터 우](원제:解救吾先生)라는 영화로 만들어졌다. 홍콩스타 유덕화가 베이징에서 신작 발표회를 갖던 날 납치되는 것으로 나온다. 이 중국영화는 스타납치극에 무게를 두기 보다는 중국 공안의 신속하고, 전문적인 수사 진행에 초점을 맞췄다.
필감성 감독은 이 사건을 다룬 다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단다. 그래도 명색이 연기자인데, 납치당했을 때 ‘자신의 장기’를 살려 뭔가 시도해 보지 않았을까. 마동석이 납치되었으면 그냥 줄을 뚝 끊고 펀치 몇 방 날리고 씩 웃으면서 끝날 것이고, 한창 때의 성룡이라면 의자랑, 곡괭이랑, 손에 잡히는 뭐든지 이용하여 뛰고 던지고 날리고 피하고 구르고 하면서 오두막을 뛰쳐나올 것이고 때맞춰 뒤에서 커다란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그 인물이 황정민이라면? 이것도 저것도 다 될 것 같다. 아마도, 악당들이 황정민을 살살 약을 올리면서 “드루와~ 드루와~” 할 것이다. 황정민은 화가 나지만 어쩔 수 없이 납치범의 말을 따를 것이다. 어쩌면 얼굴이 더 빨개져서 “형 지금 무지 화 났거던”할 것이다. 그러고는 정말 필사의 ‘밥상 연기’를 펼칠지 모른다. “으윽, 내가 지금 목이 막혀 죽을 것 같아요”하더니 정말 죽은 척 할지 모른다. 그러면 악당이 놀라서 묶었던 밧줄을 풀어주고, 이때다 하며 되살아난 황정민이 화려한 액션을 펼칠지 모른다. 감독은 그렇게 생각했고, 황정민도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다. 글쎄, 영화팬도 그렇게 생각한다. 맙소사 모든 것이 이렇게 예상한대로 진행될까.
그런데 감독은 악당 구성원의 움직임에 변수를 더한다. 그들끼리의 불협화음과 예측불가의 행동을 집어넣는다. 그러니 제법 민완의 촉을 발휘하던 경찰도 허를 찔리게 된다. 김재범을 비롯한 악당 5인방(류경수,정재원,이규원,이호정)은 낯선 얼굴을 무기로 황정민과 관객을 위협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문득 황정민의 몸값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극중에서는 특별한 계산법으로, 소박한 랜섬이 정해진다. 홍콩영화 [트리비사](2017)는 중국의 3대 악당의 범죄행각을 담은 작품이다. 극중 진소춘은 장자강이란 범죄인을 연기한다. 이 악당은 AK47을 들고 홍콩 허치슨 그룹 리카싱의 아들을 납치한다. 그는 몸값으로 20억 홍콩달러(3천억원)를 요구했다. 리캉싱 회장의 반응은 어땠을까. 이랬단다. “(은행에서 인출할 수 있는) 현금은 10억 뿐이다. 원한다면 은행에서 바로 찾아주겠다. 지금 수중엔 4천만 뿐(60억 원)이다.”고 했단다. 악당은 ‘4’(死)가 싫다며 3800만(57억원)만 가져가고, 10억HKD은 따로 받았다고 한다. 즉, 10억 3800만 홍콩달러, 무려 1500억원(200억 원)의 몸값을 지불하고 아들이 풀려난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 [올 더 머니]에서는 석유왕 J.폴 게티의 손자가 납치된 실화가 다뤄진다. 1973년의 일이다. 이 악당은 재벌 손자의 몸값으로 1700만 달러를 요구했다. 그런데 이 재벌의 생각이 독특했다. ”한 푼도 못 준다. 내겐 손자손녀가 열 넷이다. 이번에 돈을 주게 되면 다들 유괴될 것“이라고 말했단다.
악당들은 사람을 유괴하려면 대상을 잘 살펴야할 것이다. 마동석도 피하고, 연기파 배우도 피하고, 돈밖에 모르는 악질재벌도 피해야할 것이다. 차라리 그 시간에 착하게 살아라. [인질]은 시간순삭의 인질극이다. 참, 이 영화의 옥의 티를 하나 잡자면 초반에 신작제작보고회가 밤에 청담동 극장에서 열린다. 저 시절 대부분의 한국영화 제작보고회는 CGV압구정에서 열렸고, 밤이 아니라 오전 11시에 열리는게 관행이었다.. #영화리뷰 #박재환 ▶2021년 8월18일 개봉 15세관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