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 ‘현기증’(Vertigo)는 오늘 현재 세계적인 영화사이트인 imdb닷컴에 67위에 랭크되어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현기증을 느끼는 고소공포증을 가진 전직 형사 제임스 스튜어트가 금발미녀를 뒤쫓다 미스터리에 빠지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반세기가 더 지나 한국에서 같은 제목의 영화 한 편이 개봉된다. 조두순사건에 분노를 느껴 단돈 300만원으로 ‘가시꽃’이란 작품을 완성시켜 영화계를 놀라게 한 이돈구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장편영화이다. 이 영화는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소개되면서 영화팬들의 호평을 받았다.
영화는 ‘현기증’ 느끼는 한 여자로 인해 행복해야할 한 집안이 완전히 붕괴되는 비극을 보여준다. 그러나 단순한 메디컬 공포물이 아니라 그 속에 인간의 본능적 공포와 가족유대감의 진실성이 숨어있고, 곁다리로 학교폭력 등이 그려진다. 그 어느 것 하나 편안한 감정으로 바라볼 수 없는 무거운 이야기들이다.
강원도 화천에서 찍었다는 영화 ‘현기증’은 한 전원주택에 사는 엄마(김영애), 큰딸(도지원), 사위(송일국), 작은딸(김소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부부사이에 어렵게 아기가 태어나며 활기가 돋는 듯하지만 그런 평온은 순식간에 막을 내린다. 순임(김영애)이 아이를 씻기다 잠깐 현기증을 느끼며 쓰러진다. 그리고 아이가 죽는 사고가 발생한다. 이후 이 집안에 죄책감과 방향을 잃은 분노가 떠돌기 시작한다. 고아로 자라 가족과 사회에서 어울리는 데 익숙하지 않은 남편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어렵게 얻은 아이를 치매초기증세의 엄마 때문에 잃었다는 이유로 아내의 신경은 날카로워만 진다. 그리고 꽃잎이는 학교폭력에 시달리다 결국 자살을 시도한다. 이후 현기증과 치매 사이에서 죄의식을 은폐하려던 엄마(김영애)는 제정신인 듯 아닌 듯 영화를 파국으로 몰아간다.
이돈구 감독은 네 명의 중심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풀어나간다. 가족들은 제각기 힘든 사연이 가지고 있다. 가족이라는 미명하에 손만 내밀면 그 짐이 충분히 덜어질 수 있는 상황이지만 어떤 여의치 못한 사정이나 집안을 옥죄는 불안감 때문에 그 기회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게 쌓인 죄책감과 무관심, 절망은 어쩔 수 없는 비극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마지막 장면과 이어진다. 감독은 설명체로 사건의 진상을 풀어헤친다. 아마도 이런 편집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 것같다. 좀 더 미스터리하게, 좀 더 불편하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더라도 가족의 공포, 어미의 죄의식이라는 흔치 않은 소재 때문이라도 이 작품은 마스터피스가 되었을 텐데 말이다. 김영애의 광기어린 열연과 김소은의 절망적인 선택이 영화를 현기증 나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이 영화의 영어제목은 ‘Vertigo’가 아니라 ‘Entangled’(얼기설기 얽힌)이다. 비극의 출발은 하나지만, 여러 가지로 증폭된다는 것을 보여준 작품이다.
(2014년 11월 6일 개봉/ 94분/청소년관람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