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는 여름에 맞춰 스멀스멀 공포감을 느낄 수 있는 세 편의 단편들로 꾸며진 ‘공포단편열전’이 방송된다. 서보형 감독의 <솧>(2018), 안승혁 감독의 <불한당들>(2015), 그리고, 김중회 감독의 <다가오는 것들>(2019)이다. 이중 서보형 감독의 ‘솧’는 16분짜리 공포 미스터리 단편영화이다. ‘솧’는 [소]로 읽는다. 놀랍게도 국어사전에 있는 단어이다. 물론 지금은 사용되지 않는 ‘옛말’이다. 그 뜻이 궁금해지는 말이다.
영화는 한 여자가 테이블 앞에서 형사의 취조를 받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검은 배경에 여자는 두려운 듯 앉아서 형사가 묻는 말에 기억을 떠올리며 대답을 이어간다. 상황을 보니 이수진은 지금 룸메이트 이미경의 죽음에 대한 목격자 진술을 받고 있는 것이다. 조사가 길어지면서 형사는 이수진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던 순간, 화면이 밝아진다. 여태까지의 장면은 감독이 자신의 새로운 작품에 출연할 여배우를 캐스팅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는 장면이었다. 긴장감 넘치는 오디션 뒤에 이어지던 감독과 배우의 대사는 또 뜻밖에 긴장감 넘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서보형 감독 ‘솧’를 통해 감독이 배우를 캐스팅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했단다. 캐스팅(casting)이라는 단어에는 거푸집을 통해 뭔가를 주물(鑄物)로 만들어낸다는 뜻이 있었단다. 딱 짜인 틀 속에서 획일화된 뭔가를 찍어낸다는 것이다. 감독 입장에서는 그런 과정을 철학적으로 고민해봤음직하다. 내가 쓴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찍어낼 배우가 필요한지, 아니면 배우가 그 시나리오를 완전히 육화시키고 캐릭터를 창조해내는지 말이다. 그 단어 ‘캐스팅’에 해당하는 우리 옛말이 ‘솧’였단다. ‘거푸집’의 뜻이란다. 여하튼 감독의 오디션 고민을 생각해보면 영화내용에 잘 어울리는 제목같다.
어쨌든 영화는 흥미롭다. 마치 거짓말을 하는 살인자를 취조하는 형사의 수완을 지켜보는 것처럼 한동안 대화가 이어지더니, 어느새 오디션 현장의 감독-배우의 입장이 된다. 그런데, 그 감독의 대사도 조금씩 의뭉스러워지기 시작하더니, ‘단편영화’의 미덕답게 마지막 한 방이 준비되어있다. 흥미로운 단편 스릴러이다.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찰이 담긴 뜻밖의 수작이다.
●●● [인터뷰] 서보형 감독, ‘솧’에 대해 궁금한 것들 ●●●
Q. <솧>을 연출한 계기는?
▶서보형 감독: “원래 전공이 미술이고 미디어아트 쪽 작업을 해오다가 영화를 해야겠다고 마음먹고 긴 여행을 갔었다.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하고 돌아와서 나만의 영화를 찍기 위해선 일단 시네마 스터디를 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다. 영화를 구성한다고 생각해온 기본 주요 요소–컷과 미쟝센-을 의도적으로 제거한 미니멀한 영화. 롱테이크와 대사만 있는 최소한의 요소로 영화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
Q. 어떻게 ‘솧’라는 제목을 떠올리게 되었는지?
▶서보형 감독: “미니멀하게 대화만 하는 영화를 생각하니, 평소 캐스팅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는 생각이 있어서, 그것에 관한 영화가 찍고 싶어졌다. 뭔가 떠오르면, 습관처럼 단어를 찾아보는 편인데 캐스팅(casting)에는 어떤 뜻이 있는지 살펴보니 ‘주조하다’란 의미가 있었다. 그렇다면 캐스팅이란, 감독이 만든 배역이라는 거푸집에 배우들을 집어 넣어보고 그 중에 맞는 배우를 고르는 작업인가 싶었고 그 과정에서 틀에 맞지 않는 부분은 쳐낼 수도 있는 폭력적인 면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캐스팅은 너무 드러나는 제목이라 거기 대응하는 우리말을 찾다가 ‘솧’를 발견했다. ‘거푸집’과 텅 빈 내용물을 뜻하는 ‘심연’이란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어 뉘앙스가 풍부하고, 생소하지만 글자의 생김새가 재밌게 느껴졌다. 이 영화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한 느낌이 들었다.”
Q. 영화가 시작되면 ‘sabotage film’이라는 자막이 뜬다. 평소 알프레드 히치콕을 좋아하시는지?
▶서보형 감독: ‘사보타지’는 어릴 때 제가 좋아하던 별명이다. 친구들이 뜻도 모르고 그냥 제 이름과 비슷해서 그렇게 불렀었는데, 나중에 히치콕 영화를 보고 뜻을 알게 됐다. ‘파괴 공작’하는 저항 행위란 뜻이 제 영화의 태도가 되었으면 해서 항상 제 영화 앞에 그렇게 자막을 띄운다. 영화 만들 땐 다른 영화나 문학에서 레퍼런스를 많이 찾는 편인데, 이 영화는 신디 셔먼의 사진 작업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가부장적 사회가 여성을 묘사하는 방식에 관한 연작 사진들을 많이 봤다. 남성의 시선으로 짜인 프레임과 그 안에서 대상화된 여성을 재현하는 이미지가 이 영화와 주제적으로 연관을 가진다.“
Q. <솧>는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를 통해 심사위원특별상과 단편의 얼굴상(주보영)을 수상했다. 배우 캐스팅 어떻게 진행되었나.
▶서보형 감독: “인터넷을 통해 시나리오를 공개하고 대본 리딩 영상을 보내달라고 배우들에게 부탁을 드렸다.제가 제 틀 안에서 배역에 맞는 배우를 찾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는 그것에 관한 폭력성을 다루는 영화인데 말이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직접 배우들을 찾기 시작했다. 주보영 배우는 날것의 신선한 에너지가 느껴졌었고, 김종태 배우는 그가 공개한 연기영상에서 배역마다 묘하게 다른 어감과 리듬을 표현하고 있어서 노련함이 느껴졌다. 주보영 배우의 날것과 김종태 배우의 노련함. 감독의 디렉션이 없어도 그 두 배우가 서로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이 조합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Q. 연출의도에 ‘존재에 앞서 이름, 이미지, 틀, 관습과 같은 지배적 힘이 대상을 재단하고 규정하는 폭력성을 다룬다.’고 하셨는데, 이 영화를 통해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서보형 감독: “신디 셔먼의 사진작업에서 작가는 마치 카메라가 남성의 시선으로 피사체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자신을 성적 대상으로써 노출시키는 모습의 정형적인 사진을 찍는다. 단 하나 특이한 점은 카메라 리모컨을 쥐고 있는 작가의 ‘손’이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을 대상화해 카메라의 셔터를 누른다는 것이다. 이 작은 얼룩이 남성 중심적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을 전복해서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도 그 매커니즘을 노출시키고 전복하는 것이다. 은근하고 교묘한 방식으로요. 혹자는 장르적 쾌감을 느낄 것이고, 혹자는 그 쾌감을 만드는 방식을 눈여겨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Q. 미디어아트와 영화 중, 다음 차기작은?
▶서보형 감독: “미디어아트는 <솧>를 시작으로 그만 두었다. 작년에 단편 한 작품, 장편 한 작품을 찍었는데, 단편 <일식>은 현재 영화제 출품 중이고, 장편 <벗어날 탈>은 전작 <탈날 탈>의 연작 느낌으로 찍어 후반 작업 중에 있다. 단편 <일식>은 영화 촬영 현장에 대한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이다. <솧>에도 출연한 김종태 배우와 주위 영화 동료들끼리 즐겁게 노는 기분으로 찍은, 유쾌하고 기분 좋아지는 영화이다. 장편 <벗어날 탈>은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와 영감을 얻고자하는 여자가 시공을 초월해 서로 상생하는 이야기로, 이해하기 쉽진 않겠지만 본 적 없는 독특한 영화가 될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이 영화를 보는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서보형 감독: “<솧>는 제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었고 개인적으로 애착이 많은데 이런 기회가 생겨서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영화가 여러분들에게 좋은 의미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저만의 태도로 계속 영화를 만들겠습니다. 다음 작품도 기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서보형 감독과의 인터뷰는 KBS 독립영화관 송치화 작가와의 서면인터뷰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