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거대 자본의 그림자에 가려진 진실이 있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알 수 없는 병으로 쓰러져간 고(故) 황유미 씨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눈물겨운 투쟁기이다. 이런 소재의 영화가 제작되어 기어코 극장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성숙했음을 보여준다.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평범한 택시기사 상구에게 딸 윤미는 가문의 자랑이었다. 세계 제일의 기업 '진성반도체'에 취직해 가족의 희망이 되었던 딸은 입사 1년 8개월 만에 백혈병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돌아온다. 회사는 치료비와 보상금을 내밀며 산재 신청을 포기하라고 집요하게 회유한다. "개인적인 일을 왜 회사 탓으로 돌리느냐"는 고압적인 태도 앞에서 아버지는 딸이 왜 죽어가야 했는지 묻기 시작한다.
영화는 '관리의 진성'이라 불리는 거대 기업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노조도 없고, 문제는 돈으로 해결하며, 언론과 법조계마저 기업의 논리에 힘을 실어주는 현실을 날카롭게 묘사한다. "정치는 표면이고 경제는 본질"이라는 대사는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본의 논리를 씁쓸하게 관통한다. 하지만 상구는 포기하지 않고 노무사를 찾아가 딸과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더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이 영화는 시민들의 '클라우드 펀딩'으로 제작비 일부를 조달했다. 엔딩 크레딧을 수놓은 수많은 이름은 이 싸움이 결코 외로운 개인의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 2011년 법원은 마침내 백혈병과 업무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며 산재를 판결했다. 진정한 세계 최고의 기업이라면 이제 수치 뒤에 숨겨진 인간의 존엄을 직시해야 한다. 믿기 힘들다면 '추적 60분'을 찾아보거나 반드시 극장으로 가시라 권하고 싶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