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밤 KBS 1TV 독립영화관 시간에는 지난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에서 호평 받은 두 편의 한국 단편영화를 방송한다. 홍성윤 감독의 <그녀를 지우는 시간>는 작년(24회) 작품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윤동기 감독의 <손이 많이 가는 미미>는 2018년(제22회) 단편 관객상을 수상했었다. 참고로 올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는 7월 8일 개막한다. 당근, 경기도 부천에서 열린다.
홍성윤 감독의 <그녀를 지우는 시간>은 영화 만드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경험했을 악몽을 담고 있다. 마감 시간을 앞두고 뜻대로 되지 않은 작업과제, 창작자의 고민이 가득 담겨 있다. 특히 겨우 완성한 필름(요즘은 동영상 파일!)을 가지고 편집기 앞에서 사투를 펼치는 이야기이다. ‘어도비 프리미어’를 다뤄본 사람이라면 이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을 것 같다.
영화는 화사한 햇살과 함께 어리바리한 여자(박수연)와 순정남 스타일의 선배(차서원)가 펼치는 로맨스 풍 영화로 시작된다. 치아교정기를 한 여자와 선배의 결정적 순간에 별안간 공포스러운 ‘그녀’(양다혜)가 등장한다. “으악!” 실제 상황이다. 감독이 힘들게 찍은 ‘로맨스영화’의 편집실 장면이다. 찍어놓은 영상마다 마치 지뢰처럼 화면 곳곳에 그 소복 귀신이 달라붙어있다. 이유는 묻지 마라. ‘부천판타스틱영화제’ 수상작이니! 감독(서현우)은 ‘죽은 영화도 살려낸다’는 전설적 ‘편집왕’(문혜인)에게 영화 편집을 요청한다. 영화는 모니터에 펼쳐진 ‘프리미어’ 창을 주시한다. 편집기사는 능숙하게 ‘프리미어’로 가위질과 화면 덧칠 작업을 이어간다. 옆에서 감독은 “저 장면은 꼭 살려야 합니다.”부터 시작하여, “그렇게 하면 진심이 안 느껴진다”, “너가 영화예술을 아느냐”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한 평 남짓 편집실에서의 필사의 편집작업 끝에 나오는 영화는 로맨스일까 호러일까. 흥미진진. 상영시간 39분!
홍성윤 감독은 “비좁고 컴컴한 편집실에 들어가서야 영화가 완성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잊거나 외면하곤 한다. 바로 그곳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며 “스스로의 한계를 받아들여야만 만날 수 있는, 사랑스럽지만 끔찍한 악몽 같은 창작의 순간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 힘든 선택을 하는 순간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이 영화를 만든 고뇌의 순간을 이야기한다. 여름밤에 볼만한 재밌는 작품이다.
[인터뷰] 홍성윤 감독 “영진위 덕분입니다, 천녀유혼 영향입니다. 감사합니다”
Q. <그녀를 지우는 시간>을 만들게 된 계기가 있다면?
▶ 홍성윤 감독: “평소 이런저런 공상하는 것을 좋아한다. 10여 년간 꾸준히 이런저런 제작지원 사업에 매번 다른 시나리오들을 써서 지원은 해왔었는데, 한 번도 되질 않더라. 어쩌다 면접이라도 가게 되면 이상한 시나리오나 쓴다는 얘기나 듣고, 그렇게 영화를 안 찍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갔다. 그러던 참에 단 한번도 1차조차 통과한 적이 없던 영화진흥위원회에서 갑자기 제작지원을 받게 되었다. 게으른 저에게 지원금과 지원약정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준 영화진흥위원회에 감사를 드린다. <그녀를 지우는 시간>의 아이디어 자체는 중학생 때 처음 접했던 DVD의 “코멘터리” 기능에서 떠올렸다. 영화가 진행되는데, 사운드로는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리고, 그 사운드를 통해 영화에 대한 인상 자체가 다르게 느껴지던 기억을 영화로 풀면 재밌을 것 같았다. 나중에 영화 공부를 시작하고 편집을 배우면서, 아예 외부 사운드의 인물들이 진행되고 있는 영화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끼치면 더 재밌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더했다. 친구와 함께 심야영화를 보고 나와 함께 첫차를 기다리던 밤, 이런저런 영화 얘기를 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극적 요소인 ‘그녀’를 첨가하면서 지금과 같은 이야기가 완성되었다.“
Q. <그녀를 지우는 시간>이라는 제목을 짓게 된 이유는?
▶ 홍성윤 감독: “‘그녀를 지우는 시간’은 처음 시놉시스를 썼을 때 지었던 가제였다. 제목이기보단 단순히 영화의 내용 요약에 가까웠다. 좀 더 예쁘고, 좀 더 그럴듯한 로맨스영화다운 제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3-4년에 걸쳐 <그녀를 지우는 시간>, 줄여서 <그지시>로 스탭 배우분들과 작업을 해오다보니 결국 못난 제목에도 정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영화가 많은 분들께 사랑받은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해서 고마워하는 제목이다.”
Q. 이 영화는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과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멜로, 공포, 코미디가 영화 속에 녹아 들어가 있다. 영화 속에서 가장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가.
▶ 홍성윤 감독: “‘그녀를 지우는 시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실감’과 ‘그럴듯함’이었다. 왜냐하면, ‘영화의 OK컷에 나타난 초자연적인 존재를 편집해나간다’라는 기본 컨셉 자체가 굉장히 장난스러운 농담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영화의 감정을 관객들에게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영화 속 영화는 그럴듯한 실제 로맨스 영화처럼 보여야만 했다. 마찬가지로 클라이막스의 편집실 장면은 진지한 호러영화의 모양을 하고 실질적인 위협처럼 느껴져야 했다. 장르영화는 현실과 다른 세계를 다루지만, 그 영화 속 세계는 그럴듯한 현실감을 관객들에게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Q. 영화 완성 후 편집 없이 꼭 지키고 싶었던 장면이 있다면?
▶ 홍성윤 감독: “편집실의 감독과 편집자가 처음으로 화면에 나오는 투샷 장면이다. ‘그녀를 지우는 시간’은 처음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부터, ‘두 주인공이 영화가 거의 끝날 때까지 화면에 안 나온다’는 설정에 대한 ‘반대’가 많았다. 이런 건 영화가 될 수 없고, 이러면 관객들이 영화를 끝까지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었다. 하지만 저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관객들은 오히려 다양한 영화에 대해 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정작 촬영할 때는 너무 정신없는 상황에 여건도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 컷에 큰 신경을 쓰질 못했다. 그래서 컷 자체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지금도 한 번씩 아쉬움이 들긴 한다. 그래도 결국 처음 구상했고 마지막까지 고집했던 정확히 그 위치에 들어간 컷을 보면, 포기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느낀다.”
Q. 긴 시간 동안 함께한 영화의 주인공들이 있다. 박수연 배우를 비롯해, 차서원, 서현우, 문혜인, 양다혜 배우가 출연한다.
▶ 홍성윤 감독: “영화가 여러 개의 이질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캐스팅도 각 파트별로 다르게 접근을 해야 했다. 박수연 배우는 관객들에게 캐릭터를 응원하고 싶게끔 만드는 힘이 있으신 분이어서 캐스팅했다. 선배 배역은 순정만화 속 짝사랑의 대상 같은, 이미지만으로도 ‘개연성’이 생기는 배우 분이어야 했다. 차서원 배우를 서울아트시네마 굴보쌈 골목에서 만난 것은 정말 만화 같은 기적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편집실 감독과 편집자 배역은 목소리만으로 영화를 끌어가야했기 때문에 캐스팅이 가장 어려웠다. 서현우 배우와 문혜인 배우가 저의 사정을 이해해주시고 열정적으로 오디션에 참여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그녀’ 역을 맡은 양다혜는 몸의 비주얼로 표현해야하는 배역을 찾다보니 무용을 전공하는 학생이셨던 양다혜 배우님에게까지 연락이 닿았다. 양다혜 배우님은 오디션장에서 저를 보고는 몰래 카메라가 틀림없다고 확신하셨다고 하더라.”
Q. 서현우 배우와 문혜인 배우가 서로 받아치는 대사의 톤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연출하고자 하셨는지?
▶ 홍성윤 감독:“처음 두 사람은 만담, 혹은 라디오 드라마처럼 개성적인 캐릭터간의 대립과 개그로 이어지는 ‘오디오극’을 생각했었다. 배우들과 마지막까지 함께 고민을 했다. 영화에는 애드리브가 없다.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배우님들과의 고민의 흔적들을 같이 영화를 준비하는 긴 시간동안 전부 대사에 적어 넣었었고, 그 부분들이 다 영화로 완성되었다. 단편영화의 시나리오가 대사만으로도 40페이지에 가까웠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아찔하다.”
Q. 영화 속에서 감독과 편집자의 대립이 계속 이어진다. 좋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다. 감독님은 영화 속에서 감독과 편집자 중 누구의 편인지?
▶ 홍성윤 감독:“감독으로서도 편집자로서도 모두 작업을 해본 적이 있기 때문에 두 입장에 모두 이입을 해서 시나리오를 썼다. 이건 두 사람 모두 좋은 영화를 완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이고,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야만 좋은 영화가 나올 수 있다. 이 영화는 감독 캐릭터에 대한, 그리고 영화를 만들며, 혹은 뭔가 선택을 앞두고 있는 모든 분들에 대한 응원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아야한다. 편집이란 그 ‘진짜로 원하는 것’을 찾는 과정이다. 영화 속 편집감독이 감독이 올바른 길을 찾을 수 있게 결국 진심으로 가이드 해줬던 것처럼.”
Q.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 영화가 떠오르기도 한다. 평소 좋아하는 감독 혹은 영향 받은 작품이 있다면?
▶ 홍성윤 감독:“당연히 너무나 좋아한다. <러브레터>는 아마 제가 가장 많이 본 영화일 거이다. 특히 <러브레터>가 ‘시간’에 대한 영화라는 점은 <그녀를 지우는 시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처음에 세련된 도심 빌딩으로 둘러싸인 선배의 직장에서 시작한 영화는 마지막에 둘 사이의 추억이 담긴 낡은 학교 동아리실까지 점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것은 <러브레터>에서 현재시점의 추모공원에서 시작한 영화가 사건이 일어났던 설산과 과거의 도서관 카드로 끝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하지만, 영화의 전체 구조와 이야기에 있어서 가장 큰 영향을 받았던 작품은 서극 감독의 <천녀유혼>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사실, <천녀유혼>의 줄거리를 그대로 가져온 것에 가깝다고 보시면 된다. 극중 서현우 감독은 장국영인 것이고, 문혜인 편집감독은 우마 아저씨(도사)이다. 서현우 감독은 왕조현, 그러니까 박수연 배우로 상징되는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지만 그의 앞을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가 가로막고 방해한다. 그래서 프로페셔널인 도사, 문혜인 편집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 것이다. 문혜인 편집감독은 이 감독이 너무 세상 물정 모르고 바보 같아 미덥지 않아하지만, 결국 그의 순수함을 깨닫게 되고 진심을 다해 도움을 주게 된다. 그리고 클라이막스는 나무요괴와의 처절한 결투로 이어진다. <천녀유혼>의 영향은 편집실 장면에 나오는 아날로그 특수효과들에도 표현되어 있으니 알고 보시면 아마 또 다른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 같다.”
Q. 차기작은 어떻게 기대해보면 될까요?
▶ 홍성윤 감독:“로맨스 단편 영화를 하나 생각하고 있다. 형식으로나 이야기로나 <그녀를 지우는 시간>의 속편처럼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 같다. 이번 영화가 ‘편집편’이었다면, 이 영화는 ‘비평편’이라고 보면 좋을 것도 같다. 제가 SF에도 관심이 많은데, 따지자면 문과 계열의 SF로도 분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Q. 마지막으로 [독립영화관] 시청자분들에게 인사 부탁드립니다.
▶ 홍성윤 감독:“저는 어린 시절에 온 가족과 함께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던 TV 주말 영화로 꿈을 키웠다. <그녀를 지우는 시간>이 TV에서 방영된다니 그때 본 영화들 중 하나가 된 것 같아 무척 묘한 기분이 든다. <그녀를 지우는 시간>은 그때 제가 느꼈던 것처럼 오들오들 공포와 깔깔거리는 코미디, 가슴 떨레는 사랑과 소소한 감동이 부족하게나마 모두 담겨 있는 영화이다. 어린 시절의 저와 같은 즐거움을 느끼시길. 그리고. 단편영화에도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 영화 본편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담은 홍성윤 감독과의 인터뷰는 [독립영화관]의 송치화 작가가 진행한 것입니다. 인터뷰를 읽고 보면 영화가 더 재밌을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인터뷰를 읽으면 장국영의 <천녀유혼>을 찾아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