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6일 개봉한 영화 '클라이밍'(감독 김혜미)은 교통사고를 겪은 클라이머 선수 세현이 회복되지 않는 컨디션과 경쟁에 대한 압박으로 스트레스를 겪던 중 핸드폰으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신에게 연락을 받으며 벌어지는 일을 다루고 있다.
겉으로는 클라이머의 삶과 불안한 정서에 대해 다루고 있지만 그 속에는 매일 빙판 위를 홀로 걸어나가며 삶을 일으키는 모든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클라이밍'을 연출한 김혜미 감독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성으로서 수많은 여성들이 느끼는 고민의 지점들을 공유하고자 했다. 인터뷰로 만나본 그에게 '클라이밍'의 기획 의도부터 작품에 담긴 세세한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Q. '클라이밍'의 스산한 그림체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더불어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음악도 인상 깊다. 작품의 메시지를 최대한 실감 나게 전달할 수 있는 요소들이 다 채워진 작품이었다.
클라이머의 직업에 어울리는 근육질에 마른 체형을 그림체에 담으려고 했다. 내용에 맞춰 불안감이 돋보일 수 있도록 근육을 더 강조했다. 음악은 김동욱 음악 감독님 덕분에 좋은 결과가 나왔다. 곡을 분위기에 맞춰 섬세하게 잘 만드셨고 수정도 잘 해주셨다. 애니메이션은 소리가 무(無)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다 채워줘야 하는데, 음악 감독님이 설계를 잘 해주셨다.
Q. '클라이밍'은 같은 여성으로서 공감이 많이 가는 작품이었다. 특히 주인공 세현의 직업이 눈에 띈다. 주인공의 직업을 클라이머로 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임신했을 때 가장 제약이 많은 직군을 생각했다. 클라이머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가 마음에 들었다. 영화 속에서 '로프'가 중요한 상징으로 나온다. 선수들은 '자일'이라고 부른다. 클라이머 선수들에게 자일이 생명줄이라면 아이에게 자일은 탯줄이다. 탯줄로 상징되는 자일을 놓고 아이와 엄마가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생존의 싸움을 한다는 설정이다. 그런 이미지가 영화 속에 직접적으로 나오기도 한다. 클라이머가 직업군으로 소모되는 것만이 아니라 영화 속 주제와도 유기적으로 맞아떨어진다. 로프에 매달려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모습이 주인공의 극적인 불안감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Q. 임신이라는 주제를 공포의 장르로 풀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는가?
임신에 관해 행복하고 긍정적인 감정보다는 낯선 감정들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산모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다룬 영화는 자주 볼 수 있었지만 긍정적이지 않은 부분에서 다루거나 내면적인 변화에 대해 다룬 작품은 드물었다. 내가 임신을 하면서 느꼈던 낯선 감정처럼, 실제로 내가 느꼈던 부분부터 이야기가 시작됐다.
Q. 그러한 경험이 작품에 담겨서인지 주인공의 서사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한 쪽은 임신을 한 상태지만 팔다리에 부상을 당해서 자아실현이 힘든 상태고 다른 한 쪽은 유산은 했지만 자아실현을 해나갈 수 있는 상태다. 이것도 내가 임신을 했을 때 실제 경험으로부터 떠올린 설정이다. 임신을 했을 때 그 상태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임신하기 전의 모습으로 술을 마시는 꿈을 꾼 적이 있는데 '술을 마시면 안된다'는 생각이 급하게 들어 놀라서 깼었다. 그러한 충돌들이 묘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꿈을 통해서 충돌감을 느끼는 경험들이 '클라이밍' 속에서 평행 세계의 형태로 그려졌다.
Q. 사실 여성에게 있어서 출산이란 떼놓을 수 없는 고민과도 같다. 인생의 시점에 따라 임신의 존재가 축복보다는 재앙이 되기도 하기에 여성의 몸을 지닌 이들은 언제나 이에 대해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런 마음 때문인지 '클라이밍' 속 기괴하거나 유혈이 낭자하는 장면들을 볼 때 무섭다기보다는 묘하게 슬픈 감정이 들었다.
피가 치솟는 장면은 잔인하게 보이고 싶어서 넣었다기보다는 임신한 쪽과 클라이머 세현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되는 전조 장면을 임팩트 있게 보여주고 싶어서 넣은 것이다. 거울 속에서 자기 배를 찌르는데 상대는 타격이 없고 클라이머 세현 쪽이 타격을 입는다. 유혈이 낭자하는 신이지만 무서움보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담겨 있는 장면이다.
Q. 이번 작품을 준비하면서 사람으로서 성장한 부분, 그리고 더 나아가 감독으로서 성장한 부분은 어떤 점들이 있을까?
출산하기 전까지는 나도 임신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편견이 있으니 그 안에서 깨달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임신은 이것인데, 왜 다른 생각이 드는 걸까'라고 떠올리며 오히려 생각을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편견이 나쁘다고 말할 순 없었다. 내 생각의 한계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클라이밍'을 통해 남자든, 여자든,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들도 되돌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클라이밍'은 처음으로 나로부터 나온 이야기를 다 풀어놓은 경험이었다. 이전에 단편작을 작업하긴 했는데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득하고 어려운 느낌이 있었다. 완성도가 있는 객관적인 이야기를 했었다. 하지만 점점 비슷한 장르를 따라 만들면 아류가 될 것 같았다. 영화로 만들었을 때 나만의 오리지널리티가 있는 것을 만들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해야 나만의 차별성이 생긴다고 생각했고 그런 식으로 시작해서 완성까지 된 첫 작품이다. 앞으로도 고유한 작품을 해나가고 싶다. '클라이밍'은 그 첫 시작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다.
Q. 그 결과물인 '클라이밍'을 극장가에 선보이게 됐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관객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모르겠다. 만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굉장히 자신이 없는 마음이었는데 최근에 본 리뷰들이 다 따뜻해서 놀랐다. 깊이 있게 써주셔서 내가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Q. '클라이밍'을 통해 위로와 공감을 얻을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한마디 부탁한다.
나 또한 자존감은커녕, 자괴감에 스스로 힘들었던 때가 있었다. 부족한 능력에 괴로운 마음이 컸고, '클라이밍'이 완성이 될지 안 될지도 불확실한 시기였다. 남들이 아무도 내가 하는 것을 몰랐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이 완성이 되고 페스티벌에서 상도 받으니 그것을 꾸준히 하면 누군가가 알아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끝이 안 보이고 답답한 일이라도 계속해서 하고 있다면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힘든 상황이어도 자신을 믿고 끝까지 해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