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개로 ‘악의 제국’ 소련이 붕괴된 뒤 글로벌 방산업체만큼 일자리 걱정을 한 동네가 할리우드였단다. 이제 누구를 ‘빌런’으로 해야 할지 말이다. 확실히 소련은 영화에서 오랫동안 악의 축 역할을 했었다. 소련붕괴 이후 많은 새로운 ‘국제질서의 악당’등이 등장했다. 중동 테러리스트, 외계인, 그리고 김정일까지. 그래서 요즘 만들어지는 회고조의 작품에서는 과연 소련을 어떻게 다루는지가 ‘정치적 올바름’의 바로미터일 것 같다. 오늘(28일) 개봉하는 영화 <더 스파이>(감독:도미닉 쿡)도 그러하다.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ourier’이다. 물건을 옮기는 ‘택배원’, ‘운반자’의 뜻이다. 과연 주인공은 무엇을 운반하는 것일까. 위험천만한 물건이란다.
● 민간인, 에스피오나지 되다
냉전시기, 영국인 그레빌 윈(베네딕트 컴버배치)은 동유럽국가에 건설장비를 판매하는 사업가였다. 체코스로바키아 등을 오가며 (공산) 관료들의 비위를 맞추며 기자재를 수출하는 비즈니스를 펼쳤다. 어느 날 영국의 비밀정보부 ‘MI6’가 그를 찾아온다. 소련 정보기관의 거물급 인사 올렉 펜코프스키(메랍 니니트쩨)가 은밀한 메시지를 미국 측에 보냈다는 것이다.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의 행보에 초긴장 상태였던 CIA는 영국MI6를 통해 펜코프스키와 접촉을 시도한다. 그들은 소련 KGB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만만한 민간인 사업가 그레빌 윈을 이용한 것이다. 이제 윈은 ‘중장비 무역상’ 신분으로 모스크바를 드나들며 펜코프스키를 접촉하게 되고, 조금씩 위험한 임무를 맡게 된다. 펜코프스키는 미국과 소련의 정해진 전쟁을 막기 위해, 세계평화를 무너뜨릴 소련의 숨겨진 군사비밀에 대한 엄청난 정보를 빼돌려 윈에게 전달한다. 그만큼 그레빌 윈과 올렉 펜코프스키는 위험에 노출된다. 영화는 끝까지 긴장을 놓치지 않게 만든다.
영화는 실존인물의 스파이 활동을 극화한 것이다. 실제 그레빌 윈은 1960년 11월 MI6에 포섭되어 소련에서 스파이행위를 하다 1962년 10월 체포된다.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바로 ‘쿠바 미사일위기’가 발생했었다. 1961년 베를린위기와 공산주의 헤게모니를 둘러싸고 중국 마오쩌둥(모택동)의 도전 등으로 위태로워진 흐루시초프는 쿠바에 장거리 미사일 기지 건설을 비밀리에 추진한다. 카스트로를 지지함과 동시에 서방세계와의 협상카드로 쓰기 위한 신의 한 수였던 것이다. 소련의 턱 밑, 터키에 미사일 기지가 있었던 미국은 자기들의 안방 쿠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펜코프스키가 적절한 타임에, 적절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다. 미국은 첩보기 U-2를 쿠바 상공에 띄워 미사일 건설현장을 촬영하면서 협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던 것이다. (첩보위성이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쿠바미사일위기’를 다룬 책과 영화는 많다. 그런데, 그 이면의 첩보전을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만든 작품은 만나보지 못한 것 같다.
● MI6와 KGB의 공작전
베네딕트 컴버배치는 평범한 사업가에 어느 날 갑자기 스파이의 길로 나선 중년 남자를 긴장감 넘치게 연기한다. 아들을 대학 보내기 위해, 가장으로서, 돈을 벌기 위해서 이 위험한 일을 한 것일까. 그것만으로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애국심과 핵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졌을 것이고, 무엇보다 한 배를 탄 올렉 펜코프스키의 안위에 대한 걱정 때문에 본인마저 벼랑에 내몰리는 것이다. 그래서 더욱 윤종빈 감독의 <공작>이 떠오른다.
지금도 지구상 곳곳에서는 초절정 스파이 전쟁이 은밀하게,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 국가 간 첩보전쟁은 어쩌면 상대국가에서는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중간첩, 삼중간첩, 버린 패, 반간계(反間計), 내부첩자 같은 게 영화판에서 흥미로운 소재로 다뤄질 것이다. 그레빌 윈은 다행히 모스크바에서 간첩죄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몇 년 뒤 영국에 체포된 소련간첩 코논 몰로디와 교환방식으로 석방되었다. ‘코논 몰로디’도 그레빌 윈과 비슷한 형편이었다. 사업가 신분으로 런던에 와서 영국 군사비밀을 빼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KGB의 수법이 훨씬 정밀하다. 본명이 코논 몰로디는 고든 론스데일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에서 활동했다. 원래 ‘고든 론스데일’라는 인물은 1924년 캐나다에서 태어났었고 엄마를 따라 핀란드로 돌아왔다가 1943년에 죽은 것으로 알려졌다. 소련 정보당국은 ‘고든의 개인정보’를 활용하여 코논 몰로디를 ‘여전히 살아있는 고든’으로 만든 뒤 간첩활동을 이어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파이 사건은 우리나라에서도 벌어졌었다. 그는 레바논사람으로 국적 세탁되어 한국에서 간첩활동을 했었다) 올렉 펜코프스키는 바로 처형되었지만, 그린빌 윌은 영국으로 돌아온뒤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낸다. 하지만 평온한 삶은 누리지 못했다. 술에 의존하다 1990년 암으로 사망했단다.
여하튼, 중소냉전이 무엇인지, 목숨 걸고 국가에 헌신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르는 관객에게 무언가 충격을 안겨주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스파이활동은 지켜보는 관객마저 불안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