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9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 등 8개 부문을 휩쓴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는 감추고 싶은 비참한 인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영화의 원작소설을 읽어보면 영화보다 훨씬 쓰레기 같은, 막장의 인도 모습에 놀라게 된다. 그런데 소설을 쓴 작가가 인도 외교관이었다는 사실에 더 놀라게 된다. 자기 나라 얼굴에 먹칠을 하는 작품을 쓰다니. 그에 맞먹는 작품이 하나 더 나왔다. 지난달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화이트 타이거>(The White Tiger, 감독:라민 바흐라니)이다. 하얀 호랑이(백호)이다. 백년에 한번 나올까말까 한 대단히 성스러운, 영물이다. 개천에서 용 나듯이, 인도 쓰레기 하수구에서 과연 백호가 나올 수 있을까.
인구가 14억이나 되는 이 나라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고 한다. 소와 사람이 나란히 공생하는 이 나라엔 카스트 제도가 맹위를 떨친다.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소와 사람의 차이보다 더 큰 이 나라의 어떤 면이 최고의 민주국가로 취급받는지 이 영화를 보면 더 의문을 품게 될 것 같다.
영화 초반부에는 2010년 인도 사업가 발람 할와이(아르다시 구라브)가 중국 총리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장면이 있다. 3600만개나 되는 인도의 신(神)들을 이야기하며 인도에서 사업을 하려면 도덕적인 동시에 비윤리적이어야 하고, 무교면서도 신을 믿어야하고, 교활하면서도 진실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인도에서의 삶은 닭장 속의 닭처럼 영원히 갇혀있는 신세라면서 자신의 인생역정을 이야기한다.
발람은 인도 북쪽의 농촌의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출신이었다. 카스트 제도로 보자면 계층 피라미드에서 최하층. 비천하고도 비천한 가계의 자손이다. 그나마 총명하여 학교에서 영어 문장도 곧잘 읽어 운 좋게 델리로 유학갈 뻔 한다.그야말로 100년에 한번 나올 ‘화이트 타이거’ 운명인 셈. 그런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일손 하나를 내보낼 리는 없다. 특히 모든 것을 관장하는 욕심덩어리 그 자체인 할머니는 손자의 운명이란 돈 벌어오는 피붙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발람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 운전기술을 배워 마을 지주의 기사로 들어가게 된다. 재벌집 운전기사가 된 것이다. ‘기생충’의 기택처럼. 그런데, 카스트 제도의 인도에서 상류층의 운전기사가 된 하층인의 운명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비참하다. 봉건 영주시대, 노예시절의 흑인과 다름없다. 하지만 발람은 성심성의껏 주인을 모신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고. 주인마님(프리앙카 초프라)이 음주운전을 하다 아이를 치어 숨지게 하고, 그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기 전까지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발람은 그날 사건 이후, 인도의 현실에서, 카스트의 구덩이에서, 하수구 속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어떻게? 인도식으로, 발람 스타일로 말이다.
이 영화는 25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 후보에 올라가 있다. 아라빈드 아디가(Aravind Adiga)가 쓴 동명의 원작소설은 2008년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비영어권 나라에서 출간된 소설의 영역본에는 인터내셔널 맨부커상이 수여되는데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2016년 수상작이다)
주인공의 연기를 보면 발람을 연기한 아르다시 구라브가 정말 저 계급 출신에, 저런 인생 역정을 겪었을 인물 같다. 뭄바이에서 대학을 나온, 연기를 배운 배우이자 가수란다. <내 이름의 칸>(2010)에도 나왔단다. 샤룩 칸의 아역이었단다. 참, 영화에 등장하는 중국총리는 원자바오(溫家寶)이다. 물론 대역배우이다. <화이트 타이거>는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