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독립영화 시스템에서 성장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큐어>(1997)를 기점으로 부산국제영화제가 사랑해 마지않는 일본의 대표적 작가주의 영화감독이다. 호러를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온 그의 최신작은 1940년대 일본의 불온한 분위기를 담은 <스파이의 아내>라는 작품이다.
<스파이의 아내>는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파격적 내용’의 작품이라 투자를 받지 못해 하마터면 엎어질 뻔한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일본의 공영방송인 NHK의 지원으로 ‘8K’ 화질로 만들어졌다. 일반적으로 현재 보급되는 UHD(울트라HD)가 4K인데 이보다 더 선명하다는 것이다. 8K는 풀UHD로 불리기도 한다. 찍어도 내보낼 방송사도, 볼 TV도 별로 없는 상황에서 ‘올림픽’을 앞두고 NHK가 자사의 4K/8K채널에 내보낼 콘텐츠로 기획, 제작한 것이다. 작년 6월 NHK에서 방송된 뒤 화면비 변경과 색 보정을 거쳐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용감한 도전정신’ 때문인지 은사자상(감독상)을 수상했다. 이어 11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한국팬에게 극장판이 선보였다. 8K 오리지널과 달리 극장용은 2K스크린 버전인 셈. 저예산 시대극이다 보니 화질논쟁은 무의미해 보인다.
일본의 야심이 극한으로 치닫던 1940년,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는 고베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헌병대가 무역상에서 일하는 영국인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하는 등 불안이 고조된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와는 달리 유사쿠는 아내 사토코(아오이 유우)와 조카 후미오(반도 료타)와 함께 신선놀음에 가까운 삶을 살아간다. 유사쿠의 취미는 영화촬영. 아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찍고 있다. (물론, 흑백 무성영화이다!) 스파이 역을 맡은 아내는 마치 히치콕 스타일로 금고를 몰래 열다가 한 남자에게 발칵댄다. 여자는 체포되고 어디론가 끌려가서 처형되는 스토리이다.
헌병대의 막무가내 행동과 전쟁을 확대시키려는 일본의 처사에 불만을 터뜨리던 유사쿠가 어느 날 조카와 중국을 다녀온다. 촬영기를 들고 볼거리를 찍어온 것으로 보이지만, 귀국한 그의 가방에 든 노트와 캐비닛에 숨겨둔 필름은 엄청난 비밀을 안고 있다. 사토코는 이제 남편의 은밀한 행동에 의심을 품기 시작한다.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보았는지, 그리고 함께 온 여자가 누구인지 의심을 품고 헌병대장 야스하루(히가시데 마사히로)에게 달려간다.
부산영화제와 베니스영화제, 칸 영화제를 섭렵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기본적으로 인디영화의 정신을 가진 작가주의 영화감독이다.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일본의 거대한 전쟁놀이를 스펙터클한 화폭에 담으려고 하지 않았다. 1940년대 촬영장비로 찍은 만주 관동군 731부대의 비밀스런 광경을 칙칙한 영상으로 효과적으로 재현한는데 초점을 맞출 뿐이다.
이때는 군국주의가 횡행할 때였다. 천황의 신민으로 대동아공영이라는 목표를 향해 일로 정진할 뿐이다. 유사쿠 같은 반동과 사토코 같은 회색분자의 말로는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목숨 걸고 손에 넣은 증거품이 대중에게 폭로되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모든 국민’이 ‘하나 되어’ 국가목표를 이루기 위해 맹진할 때, 대의명분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희생한 의인을 다룬다. 그리고, 그 의인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의 불온과 불안, 불신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잡아낸다.
일본의 전쟁범죄를 담았기에 제작이 힘들었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영방송이 선뜻 손을 내밀었다는 것이 충격적이다. 그것도 8K로 선명하게 기록해 두었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의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