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의 한계를 넘어선 영상미의 절정. 그야말로 흑백영화의 새로운 스펙트럼을 연 영화가 오는 31일 극장가를 찾아온다. 이준익 감독이 연출한 ‘자산어보’는 흑산도로 유배를 간 정약전과 그곳에서 만난 어부 창대가 서로 지식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세계를 들여다보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준익 감독은 전작 ‘동주’에 이어 ‘자산어보’를 통해 새로운 흑백영화를 탄생시켰다. 마치 한 편의 수묵화를 보는 듯한 경이로운 영상미와 배우들의 내면이 오롯이 들여다보이는 연출은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Q. 전작들을 통해 비주류인 인물들에 관해 많이 이야기해왔다. 그중에는 당시 비주류였지만 현재에는 주류로 변한 인물들도 있다. 이러한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가진 계기는 무엇인가?
이미 그전부터 비주류 쪽의 영화를 많이 찍어왔다. 내가 비주류 출신이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주류인 외피와 비주류인 내피가 내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느낌도 든다. 어쩌다 보니 주류가 됐지만 태생이 비주류라 그 옷이 안 맞는다. 비주류적 존재들의 가치관이 소중하게 다뤄졌으면 좋겠고 그것의 연장선에서 영화들이 계속 나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이고 직업에 성실해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직업에 관한 자신은 없다. 내 필모그래피를 보면 굴곡이 너무 심하다. 어떤 것은 잘 됐다가 안 됐다가 기복이 심하다. 중간에 은퇴도 했다가 삶이 일관성이 없다. 주류와 비주류의 정체성에 혼란이 와서인지도 모른다.(웃음)
Q. (웃음) 그 혼란 속에서도 ‘자산어보’라는 놀라운 작품을 이번에 탄생시켰다. 작품 속에는 유배를 온 정약전과 그곳에서 만난 어부 창대가 서로를 알아가는, 아주 흥미로운 과정이 등장한다.
둘의 관계는 ‘격물(格物)’로부터 시작된다. 대학 팔조목에 등장하는 말로 사물에 격을 부여한다는 의미다. 사물의 이치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물에 다가가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자주 듣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 앞에 격물이 나온다. 물건에 이런 쓰임새가 있다는 것을 정하는 것이다. 마치 ‘자산어보’에서 정약전이 창대와 물고기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과정과도 같다.
Q. '자산어보'의 서문에 쓰인 창대라는 인물을 각색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창대와 정약전이 서로의 다른 이념으로 부딪히는 장면은 당대 조선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 인상 깊었다.
창대가 나주로 가 소과에 붙은 후 시 '애절양'이 등장한다. '애절양'은 조선 후기에 정약용이 유배를 가며 목격한 것을 바탕으로 지은 한시다. 작품 속에 과도한 군포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남편이 자신의 양물을 자른 장면이 있지 않나. 그 이야기가 한시의 내용에 들어가 있다. 그 시대의 민생이 지닌 척박함이 절절히 올라오는 부분이다. 아전들이 백성들의 등골을 뽑아먹고 관료들이 아전을 옹호하면서 조선의 운명을 무너뜨린 폐해가 됐다. 군포를 갓난 아기나 죽은 사람에게도 내라고 한 탓에 창대가 '이것이 다 성리학이 무너져서 그렇다'며 관아로 달려가 결국 매질을 당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애절양'은 시대에 관해 말한 가장 애절한 시다. 불편한 시기이기도 하다. 하지만 진실은 항상 불편한 쪽에 있다.
창대가 정약전에게 하직 인사를 할 때 "나는 '자산어보'의 길을 가지 않고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라는 대사를 말한다. 중요한 부분이다. 당시 지방 관리들이 발령을 받아서 부임하면 이행해야 할 행동 강령을 써놓은 것이 '목민심서'다. 공무원의 행동 수칙 같은 것이다. 창대는 임금 밑에 들어가 백성을 위한 정치 관료로 사는 것이 세상에 지식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정약전은 그 방법을 겪고 나온 사람이다. 그러기에 그는 창대의 속마음을 눈치채고 그에게 "출세하고 싶으냐"라고 역정을 낸다. 따지고 보면 둘의 논리가 다 맞지만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약전을 떠난 창대는 같이 일하는 아전들의 비리를 목격한다. 장부를 속이고 군포를 더 걷는 것은 조선판 분식회계 아니냐.(웃음) 불법 증여와도 같다. 요즘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결국 창대는 남자가 자신의 양물을 자르는 장면을 보고 아전의 목을 조르지만 사실 자신의 목을 조른 것이었다.
Q. 작품 속에는 창대라는 인물 이외에도 실제 역사 속에 존재했던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홍어 장사를 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문순득이라는 인물이 인상 깊었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떤 기준 아래 선정한 것인가?
‘자산어보’는 문순득의 존재를 건너뛰었다. 창작자로서 창대의 관점을 선택했고 ‘자산어보’의 관점으로 재구성하다 보니 문순득의 존재 자체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이외에도 정약전의 주위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주섬주섬 작품에 넣으면 관객들이 불편해 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일관되게 재구성이 되어야 한다고 여겼고 그렇게 구성했다.
Q. 스태프에 대한 애정이 깊은 것이 느껴진다. 촬영장도 분위기가 좋았을 것 같다.
자연 속에 있으면 유대가 깊어진다. 나는 감독으로서 계속 촬영장에 머물렀고 창대 역을 맡은 변요한 배우는 촬영하는 내내 집에 가지 않았다. 집에 가면 창대로 내재되어 있는 자신이 흩어질까 봐 이동할 때도 절대로 집에 안 갔다. 두 달 반 동안 그 생활이 지속됐다.
Q.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연기파 배우들이 우정 출연을 결심했다. 류승룡, 조우진 등 배우들은 정약전을 중심으로 다채로운 브로맨스를 선보인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케미스트리가 있다면 어떤 관계인가?
정약용 역을 맡은 류승룡이다. 정약용은 정약전 못지않은 아우라가 있는 배우를 캐스팅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캐스팅은 영화 속에서의 캐릭터도 중요하지만 영화 밖에서 실존 인물의 존재성과 비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류승룡이 그런 배우였다. 그는 우정 출연에 적합한 연기를 거리 있게 선보였다. 더 이상 정약전을 넘어가는 감정을 주지 않았다. 그것이 선수라고 생각한다.
Q. 영화를 보기 전부터 흑백영화라서 걱정이 되는 점보다 기대가 되는 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작품을 다 보고 나서는 이 작품을 ‘흑백 영화로 찍지 않았다면 큰일났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흑백의 뿌리가 몸에 배어있는 세대다. 젊은 사람들은 흑백을 지나간 과거라고 폄하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 반대로 생각한다. 현실이 컬러면 이제 흑백은 구식이 아니라 새롭고 세련되고 특별한 것이다. 흑백을 보면서 체득한 정보의 관점과 컬러를 보면서 체득한 정보의 관점은 다르다. 시각적 볼거리는 컬러가 유리하다. 색깔이 서로 현란하게 어우러지고 눈이 즐겁다. 흑백은 대신 뇌가 즐겁다. 그 인물의 내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칼라는 외면이 화려해서 내면을 들여다보기가 힘든데 흑백은 내면들이 덩어리 째 들어온다. 그게 감정의 스펙트럼이다. '동주' 때는 시대가 가지고 있는 무거운 공기를 이미 알고 있으니 거기서 흑백의 세련됨을 찾는다는 행위에서 불손함을 느꼈다. 하지만 ‘자산어보’에는 흑산도라는 지형이 갖고 있는 풍경,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교감이 담겨 있다. 그리고 배우들 연기가 굉장히 잘 잡힌다. 흑백영화에서는 연기를 못 하면 다 티가 난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 나오는 배우들 중 그 누구도 연기가 부족한 사람들은 없다.
Q. “흑백의 장점은 선명성”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해양 생물의 질감부터 시작해 물결에 비치는 빛까지, 색의 한계를 뛰어 넘은 영상미가 인상 깊었다. 특히 흑산도의 풍경들이 비춰지는 장면들은 마치 한 편의 수묵화와 같았다.
기쁘지만 영상미의 공은 촬영 감독의 것이다. 감독이라는 직업이 갖고 있는 대표성으로 내가 인터뷰를 하는 것이지 이 영화가 내 영화는 아니다. 겸손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촬영 감독의 열매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