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규 감독은 한국영화사의 큰 별이다. [쉬리] 이전에도, [마이웨이]이후에도 말이다. 그가 [보스턴 1947]을 찍는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한 차에 그의 대표작 중 하나가 다시 극장에 내걸렸다. 2004년 개봉된 <태극기 휘날리며>이다. 한국영화판을 스케일을 키우며 영화산업을 가능성에서 현실로 바꾸었던 그의 역작이다. 17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된 ‘태극기 휘날리며’를 다시 보면 충무로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가늠해본다.
영화의 기본적 플롯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따라간다. 지금 한창 6·25격전장에서 유골 발굴 작업이 진행된다. 죽을 때 자세 그대로 백골로 발굴된 사체 옆에는 '이진석'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만년필이 있다. 그리고 유품(만년필)을 둘러싼 동족상잔, 비극적 한국전쟁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극적 가족사는 한국전쟁 직전의 평화로운 서울 이야기로 시작된다. ‘구두닦이’ 이진태(장동건)와 중학생 이진석(원빈)의 모습을 보여준다. 형은 비록 구두를 닦더라도 몸 약한 동생을 꼭 공부시켜 서울대에 보내는 것을 유일한 희망으로 생각하고 있다. 동생은 자신을 언제나 애 취급하는 형이 불만이다. 형은 곧 장터에서 국수장수를 하는 영신(이은주)과 결혼할 것이다. 영신은 불과 며칠 전 보도연맹에 이름 석 자 써주고 보리쌀 한 되를 받아온 게 너무나 행복할 따름이다. 북한 인민군이 38선을 넘어오면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가족들은 서둘러 대구로 피난길에 오른다. 대구에서 두 형제는 강제 징집된다. 학도지원병이 되어 대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다. 형은 오직 동생의 의가사 제대를 위해 용맹한 전사가 되어 북진한다
영화는 6·25가 남긴 오만가지 이데올로기적 비극과 그동안 금기시 해오던 문학적 성과를 일거에 풀어헤친다. 김원일의 [겨울골짜기]나 아니 노근리 사건, 이것도 저것도 모른다면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에서 미군병사들의 양민학살 장면을 떠올리면 된다. 자신의 눈앞에서 전우가 죽어나가는 모습을 본 군인은 용감해진다. 그리고 비인간적으로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다. 민족은 없고, 날것의 이데올로기만 남는다. 이 영화에서 수도 없이 보여주는 전쟁의 살상 장면은 스필버그의 [라이언] 이후 이제 거칠 것 없는 영상 고어미학의 진수성찬이다.
이 영화에서는 한국전쟁 기간에 우리 국군에 의해 자행된 양민학살과 전쟁포로 학살 등 우리가 밝히기 꺼려했던, 국가적 범죄행위를 어둠의 공간에서 끄집어낸다. 죽고 사는 결정적 순간에 자의적 공간에서 군인이 뭔지도 , 애국이 뭔지도, 분명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을 인간 군상들이 피와 살을 저며 내며 6·25를 민족적, 인류적 비극으로 재단해내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선 보도연맹사건과 부역문제에 대한 아이러니도 보여준다. 서울이 붉은 군대의 수중에 떨어지고 피난 가지 못한 시민들이 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공산군에 대한 부역? 살아남기 위한 선택? 게다가 영신 같이 젊고 새파란 여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영화의 힘은 강제규 감독의 박진감 넘치는 연출력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감독은 아낌없이 화약을 터뜨리고, 끊임없이 카메라를 흔들며 전쟁의 비극을 영상에 담았다. 장동건과 원빈은 이 영화에서 전쟁의 광기와 가족애의 부담 속에서 진정한 휴머니즘을 생각하게 하는 고뇌의 캐릭터를 연기해 낸다.
이 영화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은 물론 마지막 두밀령 고지전투에서 펼쳐지는 광기 어린 두 형제의 전투 씬이다. 그러나 서울에서 펼쳐지는 완장 찬 사람들의 양민 학살 장면, 그 중에서도 영신(이은주)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어이없는 이야기는 의외로 깊은 울림을 준다.
어쩌면 모든 면에서 한국영화의 위상을 확장시킨 <태극기 휘날리며>는 시간이 지나도 빛을 보는 걸작이다. 2021년 3월 17일 재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