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각의 링에 올라선 여성 복서, 출구 따위 없는 사투의 현장을 담아낸 작품이 있다. 영화 '파이터'의 연출을 맡은 윤재호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탈북민이라는 소재를 넘어 불합리한 사회를 마주한 보편적인 여성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Q. 전작 ‘뷰티풀 데이즈’와 이번 작품 ‘파이터’는 둘 다 탈북민이라는 주제가 담겨 있다. 다양한 사회적 문제 중에서도 이러한 소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프랑스 유학을 하던 시절 ‘약속’이라는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든 적이 있었다. 2010년 불법 민박을 하고 있던 조선족 아주머니를 만나 9년 동안 아들과 생이별을 한 그의 인생에 대해 접하게 됐다. 그때 흔히 우리가 이야기하는 북한 억양과 삶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타지에서 그를 만난 경험과 그때의 감정이 너무 좋았다. 남한에 대구 사투리가 있듯이, 북쪽에도 평양 사투리가 있고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런 사투리가 어떻게 나라를 대표하고 사상을 대표하게 됐는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 과정을 거친 후 역사를 다시 공부하게 됐다. 이후 ‘북한인들을 찾아서’, ‘마담 B’를 제작했다. 10년 동안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사회가 만든 편견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본질적인 이야기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가족에나 타인에 대한 따뜻함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Q. ‘뷰티풀 데이즈’와 ‘파이터’에 이어 ‘아버지의 비밀’이라는 작품도 준비하고 있지 않나. 어떻게 이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나.
3부작 시리즈로 ‘뷰티풀 데이즈’와 ‘파이터’, 그리고 ‘아버지의 비밀’을 기획했었다. 2012년에 칸 영화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던 중 기획했던 메인 작품이 ‘아버지의 비밀’이었다. 원래 첫 번째 작품이어야 했는데 마지막이 됐다. 남북 상황이 어떻게 변하느냐에 따라서 방향성이 달라지고 시나리오가 들쑥날쑥 바뀌기도 하는 주제이기에 지금도 수정하고 있다. ‘뷰티풀 데이즈’가 과거에 집중한다면 ‘파이터’는 현재에 집중하며 ‘아버지의 비밀’은 가까운 미래를 다루고 있다. 힌트라면 ‘파이터’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진아와 이복 여동생과의 묘한 관계가 좀 더 구체적으로 그려질 예정이다.
Q. ‘파이터’를 준비하며 다양한 역사적인 자료들을 찾아보거나 탈북민 문제에 관한 사례들을 조사했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어떠한 깨달음들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역사는 각 나라마다 그들의 입장에서 쓰이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해도 다른 관점을 가진다. 나의 경우에는 부산에서 계속 살아왔고 보수적인 가족과 살아왔기에 고정관념이나 환경이 미치는 영향력을 스스로 깨부술 수는 없었다. 그 영향력을 타지에 나와서 깰 수 있었다. 내 나라를 거리를 두고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영향력을 받지 않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던 것 같다.

Q. ‘파이터’의 주인공 진아는 여성 복싱 선수다. 다양한 직업 중에서도 복싱 선수라는 서사를 부여한 이유가 궁금하다.
복싱은 규율이 엄격하고 링이라는 작은 공간 안에서 모든 것들을 싸우고 해결해야 하는 스포츠다. 그러한 특징들이 여성 탈북민이 마주하는 사회와도 비슷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탈북민을 떠나 여성으로서 사회에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그 공간에서 스스로 싸워나가고 극복해나가는 진아의 모습과도 잘 어울렸다.
Q. 주인공 진아를 실감나게 연기한 임성미 배우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신선한 마스크를 지닌 이 배우를 발견하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나?
임성미 배우를 만나기까지 1년이 걸렸다. 이번 작품에서 때와 인연이 잘 맞아떨어졌다. 처음 만났을 때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내면의 힘이 있었다. 진아 중심으로 흘러가는 영화다보니 임성미 배우의 어깨가 많이 무거운 영화였다. 하지만 촬영장에서 임성미 배우는 거의 살아있는 진아를 본 것 같다. 배우 스스로가 굉장히 많은 노력했고 제작진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임성미 배우를 향한 믿음으로 ‘파이터’라는 영화를 만들었다.
Q. 제작진과 배우들의 믿음이 두터운 촬영 현장이었을 것 같다. 촬영하면서 서로에게 가장 의지했던 순간이나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었나?
진아랑 태수가 시장을 걷는 신이 있다. 우리는 회차가 작은 영화고 실제로 그 회차에 해결을 못하면 다음 기회라는 게 없었다. 그대로 엎어질 수밖에 없는 영화 구조였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빠르게 신들을 찍어야 했다. 문제는 시장에서 장소를 옮겼는데 사운드가 시끄러워서 사운드 녹음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고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배우들이 새로운 낯선 곳에 와서 갑자기 중요한 감정 신을 쉽지 않았을 텐데 열심히 해줬다. 그러고 나서 조깅 신을 찍을 때는 마침 해가 뜨기 10분 전이었다. 스태프 모두가 다 힘을 내서 뛰었다. 그 때 같이 헉헉 거리며 촬영을 마치고 해 뜨는 장면을 바라봤을 때 기뻤다.
Q. 시장 신, 조깅 신도 인상 깊었지만 극중 태수가 집 앞에서 진아에게 대시하는 현실적인 연애 신 또한 기억에 남는다. 분량은 짧지만 부동산 아저씨가 등장한 신과도 대비된다. 태수는 연애에 있어 어설프고 서투른 남성이지만 부동산 아저씨는 폭력적으로 다가가는 남성이다.
같은 장소에 등장한 두 남성에게 차이를 주고 싶었다. 태수는 외관상 불량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마음이 따뜻하고 부동산 아저씨는 단정하게 보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썩어 있다. 태수는 대시를 할 수도 있겠지만 더 기다려주는 면모를 보이고 반면에 부동산은 무턱대고 들이대고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 두 남자의 모습을 통해 외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면적으로 사람이 성숙하고 올바른 방향을 가져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Q.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실 ‘파이터’는 탈북민의 이야기를 넘어 보편적인 여성들의 이야기라는 생각도 든다. 부동산 아저씨가 집에 들어오려는 것을 막아선 후 방에 돌아와 공포에 떠는 진아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탈북민에 대해서 다루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대상을 꼭 꼬집어서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개인사지만 그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들은 더 광범위하다. 조감독이나 연출팀을 비롯한 ‘파이터’의 여성 스태프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괜찮아 보이지만 갑자기 돌변하는 부동산 아저씨 같은 남성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여성 관객들에게 공감이 잘 되는 영화가 되길 희망한다. 남성 중심의 불합리한 사회 속에 처한 여성에 대한 생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Q.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수록 현 세대가 생각해봐야 할 주제들이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의 모습을 그려나갈 이들이 ‘파이터’라는 작품을 어떻게 생각했으면 좋겠는가?
이전에 아버지가 술이 좀 취해있을 때 카메라를 들고 질문을 한 적 있다. “아버지는 왜 북한을 싫어하느냐?”라고 묻자 그 대답은 간단했다. “싫으니까”였다. 정당한 이유가 아닌 의미 없는 대답이었다. 그렇다면 ‘아버지 세대는 어떻게 성장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질문부터 모든 것이 시작됐다. 그러한 질문들이 지금 세대도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각자의 생각들이 표현되어 그 대상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이유가 무엇인지 분석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됐으면 좋겠다.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영화인 것 같다. 관객들과 만나면서 생각하고 있는 질문들을 제시하고 그에 대해 대화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