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고의 문학사에서 독자와 호흡하며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받은 대표적 캐릭터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 돈키호테는 이 세상의 부정과 비리에 돌격하는 한 정신나간 기사의 역정을 담고 있다. 세상 사람은 그가 미쳤다고 손가락질 하지만 그에게는 정의와 신념, 충성과 사랑이 넘쳐난다. 1605년 스페인의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창조해낸 돈키호테의 기사가 코로나 지옥에서 뮤지컬로 되살아난다. 비록 기사는 엉거주춤, 엉망진창의 갈지자 창을 휘두르지만 관객은 그 삶의 무거운 의미를 깨닫는다.
뮤지컬 [맨오브라만차]는 1959년 방송작가 데일 와써맨의 TV드라마로 시작되었다. 미국 CBS에서 [아, 돈키호테]로 방송되었던 이 작품은 1965년 뮤지컬로 만들어졌으며, 이후 브로드웨이에 진출했고 반 백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걸작 뮤지컬의 반열에 올랐다. 한국에서는 2005년 국립극장에서 첫 (라이센스)공연을 가졌고, 주기적으로 무대에서 ‘슬픈 수염의 기사’이야기를 전했다. 2018년 공연까지 총 761회 공연을 통해 누적관객 70만 명을 동원한 인기 레퍼토리이다. 코로나 사태 속에 3년 만에 다시 공연을 갖는 이번 시즌에는 류정한, 조승우, 홍광호가 기사를 연기한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소설 [돈키호테]와 그 저자 세르반테스를 한꺼번에 무대에 올린다. 흥미로운 극중극 구조의 작품인 셈이다.
시인이며 세무공무원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신성모독 죄목으로 언제 처형당할지 모른 채 지하 감옥에 수감된다. 이 곳에서 그는 수감된 죄수들과 함께 자신이 쓴 이야기를 한 편의 연극/뮤지컬로 펼쳐놓기 시작한다. 라만차에 사는 나이가 아주 많은 노친네 알론조 키아나는 기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에 탐닉한 나머지 머리가 어찌 되어 자신이 기사가 된 것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시종 산초를 데리고 썩을 대로 썩은, 잘못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 잡겠다고 나선다. 무적의 기사, 라만차의 돈키호테가 되어 돌진한다. “거친 바람 불어와 나를 깨운다~”
세르반테스의 원작소설은 꽤나 두껍다. 제대로 읽은 독자는 피터 오툴과 소피아 로렌이 나온 그 영화를 본 사람만큼 적을 것이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햄릿’에 대해 다들 아는 것처럼, 돈키호테의 ‘특별한’ 기사정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뮤지컬 버전에서는 알론조는 풍차에 돌진하고, 허름한 여관을 영주의 성으로 착각하고, ‘알돈자’를 고귀한 공주 돌시네아로 믿는다. 제정신이 아닌 ‘기사’는 이제 자신만의 생각으로 자신만의 적을 처단하고, 자신만의 이상을 위해 돌진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비웃고, 손가락질하고, 놀리고, 장단을 맞춰준다. 하지만 산초는 ‘왜 그런지 그런 기사가 ’그냥 좋다‘며 따라가고, 세상의 남자는 모두 ’다 똑 같아‘라고 말하던 알돈자는 그의 진심에 마음이 흔들리게 된다.
미치 리가 만든 곡은 그야말로 명곡의 퍼레이드이다. 가슴 뛰게 하는 신나는 오프닝 반주에 이어 쏟아지는 감옥 송들부터 시작하여 ‘돌시네아’, ‘그분의 생각뿐’, ‘좋으니까’ 등이 마구 쏟아진다. 물론 그중 하이라이트는 당연히 ‘이룰 수 없는 꿈’이다.
그꿈 이룰 수 없어도....
길은 험하고 험해도
정의를 위해 싸우리라
사랑을 믿고 따르리라
잡을 수 없는 별일지라도
힘껏 팔을 뻗으리라.
물론, 각 캐릭터의 진심이 우러나오는 화려한 노래를 지켜보다가 알돈자를 둘러싸고 등장하는 너무나도 서정적인 노래 ‘새야, 작은 새야’에서 충격적인 무대가 펼쳐진다.
이번 시즌에서 라만차 기사를 연기하는 조승우, 류정한, 홍광호는 이미 무대에서 한 가락씩 하는 무적의 용사들이다. 이젠 눈을 감아도, 아무리 비틀비틀 엉거주춤 무대를 휘저어도 그들이 엎어질 곳, 일어설 자리를 체화하고 있다. 목소리도 이제 라만차의 미친 노인에 최적화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와 함께 따라다니던 시종 산초가 펼치는 파트가 도드라지게 느껴진다. 단지 ‘좋아서’ 쫓아다니는 그에게서 인간의 희로애락의 그림자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엄청나게 비극적인 스토리인 셈이다. 단지 독서의 부작용이나, 기사도 정신의 후유증이 아니다. 땅바닥에 발을 딛고 있는 모든 세상의 남자들이 창 하나를 들고 엉망이 되어버린 세상에 뛰쳐나간다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거울에 비친 초라한 자신을 보는 ‘슬픈 수염의 기사’는 그래서 관객의 공감을 더 받는지 모른다.
‘슬픈 수염의 기사’는 오늘도 무대 위를 달려갈 것이다. 비틀대며, 영원히 저 별을 향하여! 류정한, 조승우, 홍광호, 최수지, 김지현, 윤공주, 정원영, 이훈진 등이 출연하는 뮤지컬 '맨 오브 라만차'는 오는 3월 1일(월)까지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된다. (KBS미디어 박재환)
[사진= 맨오브라만차 공연사진/ 오디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