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기행
옥실(이정은)에게는 딸이 넷이 있었다. 막내인 경주가 경주로 수행여행을 떠나던 날이었다. 아침 댓바람에 문을 나섰다가 다시 돌아온 막내가 엄마에게 투정을 부린다. “딸내미 가는데 나와 보지도 않아? 사흘이나 못 보는데 배웅은 좀 하지...” 엄마는 “애가 왜 짜증이야?”라고 대꾸한다. 전형적인 한국의 모녀관계, 애정의 표현이다. 그런데, 그 아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경주는 불귀의 객이 된 것이다. 경주를 잔인하게 살해한 놈은 잡혔지만 법의 무게는 충분하기 않았다. 옥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오늘(26일) 개봉하는 김미조 감독의 <경주기행>이다. 장편데뷔작 <갈매기>(20)에서 성폭행 당한 중년여성의 복잡한 여정을 섬세하게 담아낸 김미조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엄마의 사무친 복수의 무게를 다룬다.
●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이야!”
영화가 시작되면 낡은 승합차를 타고 여행이라도 떠나는 듯한 가족을 보여준다. 엄마(옥실)와 세 딸, 장주, 영주, 동주이다. 티격태격한 모습은 평범한 딸부잣집 모습이다. 하지만 이들의 여행의 목적은 특별하다. 남자 하나를 꽁꽁 묶어서 경주로 옮기는 중이다. 사연은 곧 밝혀진다. 8년 전 또 한 명의 딸, 막내 ‘경주’가 경주로 수학여행 간다고 떠나던 날 그 남자, 백상현(변요한)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막내가 죽은 뒤 남은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선처를 바란다는 알량하고도 얄팍한 법정극이 펼쳐졌을 것이고, 아버지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피해자를 두 번 죽이는 짓이야!”라고 부르짖으며 법원 건물에서 투신자살한다. 이제 옥실은 가슴에 품은 불덩이를 안고 백상현을 직접 처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나머지 세 딸과 함께.
영화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과 비극, 그리고 남은 가족의 복수극을 다룬다. 하지만 남은 가족은 ‘김부장’도 아니고 ‘리암 니슨’도 아니다. 승합차에 날아든 벌레 한 마리도 어쩌지 못해서 법석을 뜨는 보통 사람일 뿐이다. 가진 것이라곤 처연한 마음의 엄마와 얄팍한 법지식의 둘째, 레슬링을 했다는 셋째, 그리고 현실적 삶을 살고 있는 첫째일 뿐이다. 백상현은 잔인한 범죄자일 뿐이다. 이들의 경주기행은 치밀한 계획과 천운과는 거리가 먼 위험천만한 길일 것이다.
경주기행
● 우리 마음속에 살아있는 경주
김미조 감독은 한 집안에 들이닥친 비극적 사건의 경과를 전한다. 엄마 옥실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고, 그날 이후 이성의 끈을 잃었을 남편마저 보낸 뒤 어떤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사회적 규범, 법의 엄격함, 인과응보 같은 우아한 이야기는 결코 가슴 속 불덩이를 꺼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엄마의 모습, 붕괴된 가족을 지켜보는 딸들은 어떨까. 감히 이해할 수 있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분노와 좌절, 자책과 회한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삶의 출구를 모색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 녀석만 죽인다면 우리 가족은 새 출발할 수 있을 거야.”라는 엄마의 다짐을 믿고 싶을 것이다.
수학여행의 성지인 천년고도 경주는 역사의 보고이다. 하지만 경주네 가족이 찾아가는 대릉원과 분황사지 등은 그들에게 역사의 고귀함이나 선조의 깊은 얼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천년 역사의 무게나 역사적 이야기는 그 가족의 사연과 슬픔을 결코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옥실은 복수를 하냐고? 김미조 감독의 복수극은 처절하다.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것만큼 숭고하다. 감독이 CG로 완성시킨 절벽과 나무와 목줄, 그리고 멀리 바라보이는 경주시내는 떠오른 아침 해와 함께 관객에게 깊은 정서적 교감을 안긴다. 함께 손을 내밀고 그 줄을 당기고 싶은 공범의식까지. 마지막에 판사가 어떤 판결을 내릴지 관객은 짐작한다. 어떤 법의 망치질이 있든지 간에 옥실을 소진시키던 불은 꺼지고, 이제 남은 그들은 경주를 경주로 오롯이 받아들이고, 바라보고, 기억할 것이니 말이다. (박재환)
▶경주기행 (2026) (The Journey to Gyeongju) ▶감독: 김미조 ▶출연: 이정은, 공효진, 박소담, 이연, 변요한, 정애화 ▶제작사:스튜디오하이파이브 ▶배급사:롯데엔터테인먼트 ▶개봉: 2026년8월26일/15세이상관람가/110분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