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연인들
박진표 감독의 <죽어도 좋아!>(2002)라는 작품이 있다. 일흔을 넘긴 두 노인네가 각자의 배우자와 사별을 한 뒤 죽음보다 외로운 고독과 살아가다 운명처럼 만나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작품이다. 한국영화사에선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작품으로 기록된다. 이후 ‘문제적 장면’ 14초가 삭제되어 개봉되었다. 이렇게 소개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노인문제의 심각성, 혹은 황혼로맨스의 아름다움을 언급하는 것보다 ‘제한상영가’라는 단어로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김태휘 감독의 <빈집의 연인들>이란 작품이 극장에서 공개된다. 이제 노인의 문제, 그 본질에 더 주의를 기울일 때가 된 것이다.
농촌마을. 은자(정애화)는 오늘도 멍한 정신으로 일어난다. 간밤에 마신 소주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나가는 밭일에도 제때 가지 못한다. 일당을 받았으면 소주를 사먹었겠지만. 그 일로 작업반장과 대판 드잡이를 한다. 그렇게 은자는 시골에 혼자 까칠하게 살고 있다. 남편은 죽었고, 아들 내외는 결혼해서 도시에 산다. 술을 들이키는 것 외에는 어떤 삶의 자극도 없는 듯하다. 그런데 어느 날 혼자 사는 그의 집에 도둑이 든다. 눈이 마주친 순간 도망가 버린 그 놈. 얼마 후 다시 만난다. 오복(기주봉)은 낡은 승합차를 타고 시골 빈집만 골라 터는 좀도둑이다. 두 사람은 기이하게 만나 운명적으로 동행을 한다. 같이 낡은 이스타냐를 타고, 시골마을을 돌며 빈집을 골라 터는 것이다.
지난 해 개봉된 <사람과 고기>에서 인생의 끝과 빈곤의 낭떠러지에서 만난 세 노인은 고깃집을 순례하듯 찾아다니며 무전취식하며 삶의 희열을 느끼는 묵직한 이야기로 관객에게 먹먹함을 안겨주었다. 이번 <빈집의 연인들>에서도 그 연장선상의 이야기를 펼친다. 집이 있고, 일거리가 있고, 추억거리가 있는 노인, 은자는 왜 술에 빠져 사는 것일까. 오복은 왜 홈리스가 되어 낡은 차로 시골을 누비며 좀도둑질을 하고 있을까. 호구지책일 것이다.
그런데 오복의 행동을 보면 특이하다. 빈집을 싹쓸이 하는 것이 아니라, 티 안 나게 푼돈만 훔친다. 그러면서 눈에 띄는 가족사진 액자를 챙겨간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오복은 그렇게 행복한 가족이 그리웠을지도 모르고, 나도 가족이 있었으면 생각할지도 모른다. ‘좀도둑’ 오복의 차에는 클래식 카세트테이프(‘성음’브랜드)가 한 박스 있다. 낡은 차안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음악은 모차르트의 ‘세레나데’(Eine kleine Nachtmusik K.525)이다. 이곡은 이후 계속 들려온다. 오복의 선곡에서부터 그의 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엘비라 마디간의 피아노협주곡21번만큼이나 황홀한 사용이다) 오복의 심성이나 취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장면으로는 여관에 걸려있는 그림이다. 파도가 밀려오는 바다에 서있는 나신(裸身)의 남녀 모습을 두고 도슨트처럼 설명하는데 두 사람의 심정을 적절히 은유한다.
빈집의 연인들
먹을 만큼 먹은 나이, 살만큼 산 삶, 지킬 만큼 지켰을 인생의 규율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내달리는 은자와 오복을 통해 그들의 외로움과 고독함, 무쓸모의 늪에서 헤어 나오는 동아줄을 잡은 것 같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이어질까. 승합차가 그들의 영원한 벽과 천장이 될 수는 없을 것이고, 빈집털이가 그들의 삶의 낙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은 은자도 알고, 오복도 알고, 훨씬 젊은 관객도 알 것이다. 황금빛 노을의 바다에서 두 사람은 미래를 이야기할까, 지금 이 순간을 이야기할까.
▶빈집의 연인들 (The Burglars) ▶감독/각본/편집: 김태휘 ▶출연: 정애화, 기주봉 ▶제작:페니로얄 필름, 테이크 어 페블 ▶배급:㈜마노엔터테인먼트 ▶개봉:2026년 8월12일/15세이상관람가/93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