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인의 정체
정말 독특한 자신만의 영상미학을 가진 한국 영화감독이 이번 주 KBS 1TV <독립영화관>에서 소개된다. 지난 달 극장에서 개봉된 <지느러미>를 연출한 박세영 감독이다. <지느러미>는 ‘통일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SF다. 오염된 바다를 막기 위해 4000km 장벽이 세워진 근미래, 유전적 돌연변이 오메가는 바다를 청소하는 노동자가 되어 인간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얼핏 들으며 <오디세이>급 블록버스터 같지만 제작비 3,500만원으로 완성된 저예산독립영화이다. 장편데뷔작 <다섯 번째 흉추>(2022)와 <지느러미> 사이에 박세영 감독은 기이한 단편을 잇달아 만들었다.
박세영 감독의 한예종 졸업작품은 매일 해 질 무렵 뒷산을 산책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었다. 12시간짜리 가편집본을 본 교수가 “이건 영화가 아니다”라며 퇴짜를 놓았다고 한다. 박 감독은 ‘기승전결이 있어야’만 영화라고 한다면 그렇게 만들어보겠다며 급하게 단편 ‘캐쉬백’을 만든다. 그 작품은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편집상을 받았다. 오늘 [독립영화관]에서는 박세영 감독의 네 편의 단편영화가 소개된다. <버티고>, <미쉘>, <괴인의 정체>, <원령공주>이다. 혹시, 야심한 시간에 이 네 편의 작품을 다 보는 시청자가 있다면, 한국영화의 다양성과 한국영화인의 창작 역량에 놀라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이게 영화냐?”며 중간에 넷플릭스에 접속할지 모른다.
오늘 소개되는 박세영 단편 중 그나마(?) 가장 영화답고, ‘케이’(K-)스러운 작품은 <괴인의 정체>이다. 상영시간 16분의 <괴인의 정체>는 흑백영상에 대사도 없다. 독특한 서체의 자막으로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다. 굳이 어느 시대라고 특정할 수는 없지만 ‘토지’(박경리 소설) 시대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한 남자가 애달프게 여자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그 때 나오는 자막은 이렇다. “놓거라. 저 양반이랑 가면 굶주리지 않을 거야” 가난과 배고픔으로 누나는 그렇게 남동생을 양반에게 쌀 한주머니를 받고 노비로 팔아넘기는 모양이다. 아니면 그렇게라도 남동생이 살아남으라고 생각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동생을 떼어놓고는 받아든 생쌀을 우적우적 씹어 먹으며 배고픔을 채우자 그제야 서러운 생각이 몰려오는지 통곡한다.
동생을 찾아 양반집에 갔더니 지붕에서부터 피가 뚝뚝, 줄줄 흘러내린다. 사라진 동생을 찾아 숲으로 향하고, 그곳에서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를 만난다. 까마귀가 전하는 괴이한 말에 따라 숲을 헤매는데 저 길 끝에서 더욱 괴기한 모습의 동생이 나타난다. 하지만 둘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동생은 돌을 들어 까마귀를 내리치고 이어 괴인을 마구 찍는다.
괴인은 누구인가. 이야기의 흐름은 따라갔지만 그 이야기 너머, 인물의 속을 제대로 헤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굉장히 인상적인 전통악기가 울리는 음악소리와 함께 박세영 감독의 이름을 각인시킨다. ▶2026년 8월 7일(금) 밤 11시30분 KBS 1TV [독립영화관]
버티고
■ 버티고 (2021년, 5분) 다섯 명의 댄서가 한 공간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호루라기 소리에 따라 규칙적으로, 조금씩 속도가 빨라진다. 카메라를 바라보는 숏, 상대를 마주보는 리버스 숏이 이어지며 관찰자와 대상의 시점을 생각해 보게 한다.
■ 미쉘 (2024년, 17분) 해가 뜨기까지 관계를 살려보기 위해 마지막 하루를 함께 보내기로 한 연인이 동해안의 여관에 묵는다. 일출을 15분 앞둔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이별일까, 세상의 끝일까. 제한된 공간에서 두 배우의 클로즈업으로 채워진 신비하고 기이한 박세영표 미니멀 영화이다.
■ 괴인의 정체 (2024년,16분) 배가 고픈 누나는 쌀 한 줌을 얻기 위해 동생을 넘긴다. 생쌀을 씹어 먹고는 문득 이성이 돌아와서 동생을 찾아 나서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고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까마귀가 이상한 소리를 한다. 동생은? 까마귀는? 괴인은? 나는? 영화를 보는 사람도 늪에 빠져든다.
■ 원령공주 (2024년, 35분) 전국귀한(歸韓)동포총연합단은 한국 국적을 회복한 중국동포 단체로, 이곳의 주요 활동 중에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 공연이 포함되어 있다. 박세영 감독은 이들의 무대 속에서 희미해진 역사의 기억을 포착한다. 리움미술관의 “드림스크린” 전시를 통해 첫 공개된 작품이다. 박세영 감독 특유의 감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