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
프랑스 누벨바그 걸작들을 시네마테크가 아니라 일반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최근 들어 <국외자들>, <미치광이 피에로>에 이어 장 뤽 고다르 감독의 또 다른 걸작 <경멸>이 극장에서 공개된다. <경멸>(1963)은 여타 누벨바그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오랫동안 시네필에 의해 경배되어 온 작품이다.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소개되는 <경멸>에서는 시네시타의 나른한 오후의 스튜디오 풍광과 카프리의 푸른 바다, 그리고 빨간 색 소파 위 브리지트 바르도의 눈부신 나신을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다.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소설을 옮긴 이 작품은 남녀의 사랑싸움에서 파탄에 이르는 관계의 궤적을 따른다. 그 과정에 놀랍게도 호메로스의 ‘오디세이’가 거론된다.
영화는 이탈리아 로마 교외 시네시타 스튜디오의 촬영장 모습과 함께 장 뤽 고다르 특유의 장난스러운 오프닝 신으로 시작된다. 이어 카메라는 연인 폴(미셸 피콜리)과 카미유(브리지트 바르도)의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아파트를 비춘다. 희곡작가인 폴은 미국인 프로듀서 제리 프로코쉬(잭 팰런스)의 부름을 받고 스튜디오를 찾는다. 제리는 프리츠 랑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 ‘오디세이’를 흥행대작으로 만들 야망에 들떠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를 폴에게 맡길 생각이다. 첫 만남에서부터 속물적 허세를 감추지 않는 미국인 프로듀서에게 폴은 어느 정도 주눅이 든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카미유에게 뻔뻔하게 자기 차(빨간색 알파로메오)에 타라고 말한다. 남편은 이를 바라만 본다.
이제 영화는 대작 <오디세이>를 둘러싼 제작자의 입김, 그리고 미녀 카미유(브리지트 바르도)를 둘러싼 미묘한 신경전 속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 ‘가난한 연인’의 사랑과 믿음이 이제 거대한 헐리우드의 오만에 무너지는 모습이 문학적으로 펼쳐진다. 폴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라는 끝없는 물음과 자신 없는 대답을 반복하는 것뿐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 개봉을 앞두고 장 뤽 고다르의 <경멸>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건넨다. <메트로폴리스>와 <M> 등 독일 표현주의 영화를 만들었던 대감독 프리츠 랑은 제리에게 고용되어 대서사극 ‘오디세이’의 감독을 맡아, 그 역을 직접 연기한다. 프리츠 랑은 시나리오 작가 폴과 ‘오디세이’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주인공 오디세이는 페넬로페를 사랑했는가이다.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신의 저주를 받고 10년의 세월을 생고생한 오디세이를 두고 아내 페넬로페에게 염증을 느껴 전쟁을 핑계로 떠났고, 그녀 곁으로 다시 돌아오기 싫어 바다를 떠돌았다는 것이다. 문학사에 있어 획기적인 이론인 셈이다. 하지만 이런 오디세이-페넬로프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폴과 카미유의 결혼생활의 실상을 파고든다.
경멸
제목 ‘경멸’은 아내 카미유가 남편 폴에게 하는 직접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아름답고 섹시한’ 카미유가 언제부터, 왜 남편을 경멸하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고매한 ‘작가’ 남편이 ‘전직 타자수’ 아내를 두고 윤리적 딜레마를 논하지만, 실제 두 사람은 아파트 월세와 원고료를 걱정해야 할 만큼 현실적인 문제에 얽매인 이들이다. (그리고 폴은 이탈리아 공산당 당원증을 가지고 있다)
104분 영화에서 브리지드 바르도의 눈부신 나신을 의도적으로 몇 차례 비추는 것만큼 아파트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대화, 불화, 싸움을 오랫동안 비춘다. 행복했던 2년의 결혼생활이 ‘시나리오 계약’건 때문에 허망하게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이 아파트 신은 촬영감독 라울 쿠타르의 유려한 카메라워킹이 실제 드라마 같은 친밀감을 더한다. 영화에서 제작자는 이들 커플의 파경에 쐐기를 박듯이 카프리섬으로 유인한다. 관객은 카프리의 푸른 바다와 말라파르테 별장의 그림 같은 풍광을 만나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풍광과 <오디세이>의 거창함과는 달리 부부의 신뢰는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BB’는 주연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BB)를 뜻하면서, 동시에 고다르가 경애했던 극작가 베를톨트 브레히트(BB)를 중의적으로 가리킨다.
모라비아의 소설 <경멸>은 미국에서 <한낮의 유령(A Ghost at Noon)>으로 번역 소개되었다. 왜 굳이 제목을 바꾸었을까. 어두운 밤이 아니라 한낮에 나타나는 유령이라니. 소설 속 부부의 관계가 파탄 나고 사랑이 경멸로 변하는 순간은 카프리의 뜨거운 햇빛이 쏟아지는 한낮이다. 대명천지에 파탄 나는 관계라니, 오해일 수도 소외감일 수도 있는 그들의 껍데기뿐인 관계를 생각하면 꽤나 잘 어울리는 제목이다. 60년도 더 된 오래된 영화지만 여전히 눈부시게 빛나는 작품이다. 브리지트 바르도도, 미셸 피콜리도, 잭 팰런스도, 장 뤽 고다르 감독과 촬영감독도 모두 마찬가지다. 누벨바그라는 사조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절의 뜨거웠던 영화혼과 문학정신을 만끽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작품이다.
<경멸>은 오디세이에 대한 이야기이며,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 대한 고전적인 보고서다. 믿음이 없으면 순식간에 금이 가고 깨어지고 마는, 유리처럼 가난한 연인들의 이야기다. (박재환리뷰)
▶경멸 (Le Mépris / Contempt) ▶각본/감독: 장 뤽 고다르 ▶출연: 브리지트 바르도, 미셸 피콜리, 잭 팔란스, 프리츠 랑 ▶개봉:2026년7월15일/104분/15세 이상 관람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