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 붙인 이름에 가려 자신의 이름을 잃어가는 여성들이 있다. 누군가는 이를 엄마가 되는 과정이라, 또 누군가는 가족의 한 구성원이 되며 벌어지는 불가피한 상황이라 여긴다. 하지만 애달프게도 대한민국 사회에서 그들이 한번 잃어버린 이름들은 돌아오기 쉽지 않다. '큰엄마의 미친봉고'(감독 백승환)는 큰 엄마가 며느리들을 데리고 명절날 탈출을 감행하는 유쾌한 이야기다. 그 속에는 여성들이 서로의 이름을 찾아가는 고되지만 찬란한 과정이 담겨 있다.
Q. ‘큰엄마의 미친봉고’가 21일 극장 개봉과 더불어 28일 OTT 플랫폼 시즌을 통해 공개된다. 감독으로서의 소감이 궁금하다.
원래는 극장 개봉 영화로 준비를 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회의를 했을 때 영화에 대한 반응들이 좋아서 극장의 문을 두드려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메가박스에서 작은 영화지만 개봉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이 있다고 해서 관계자를 만났고 흔쾌히 하자고 해주셔서 개봉하게 됐다. 영화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극장에서 볼 수 있게 되어서 좋고 떨린다.
Q. 이번 작품은 전작 ‘대리 드라이버’라는 작품과 닮았다. 두 작품 모두 사회 속 보이지 않는 갑을 관계를 다뤘다. 일명 '시월드'도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갑을 관계들 중 하나다.
선배들은 어떻게 평가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조직 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한다.(웃음) 나름 선배들한테 항상 충성을 다하는 직장 생활을 해왔다. 그 안에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만 느낄 수 있는 어떠한 페이소스를 느낀 것 같다. 그리고 원래 관계성과 위계질서와 같은 지점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 권력 관계를 없애야 된다기보다는 그 속에 웃음과 슬픔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Q.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며느리들의 명절 탈출기라는 소재만으로도 여성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작품이다.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서로의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우리도 작은 엄마, 이모, 고모의 이름을 잘 모르지 않나. 그녀들의 이름을 찾아가는 과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에 그녀들이 펜션에서 와인 한 잔 하면서 서로 이름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Q. 극 중에서 이러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담긴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가 있었는가?
대사의 경우에는 내가 쓴 대사는 아니고 하서호 작가가 쓴 대사 중에 젊은 고모가 "우리 엄마한테 인사해"라는 대사가 있다. 그 말이 뭉클했던 것 같다. 우리 집 일은 아니지만 옛날 가정들을 보면 둘째 어머니의 존재가 있고 어머니가 다른 형제나 남매들이 있다. 거기서 오는 서러운 감정이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잘 표현한 대사였다.
Q. 영화를 보며 감독에 대해 궁금해졌다. '큰엄마의 미친봉고'에 나오는 다양한 인간 군상들 속에서 꼽자면 어떤 인물과 자신과 가장 닮았다고 생각하는가?
닮은 사람을 꼽자면 장손으로 나오는 유화상 역할이다. 극 중에서 흰 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있다. 차례를 지내야 하니까 셔츠는 입었는데 '내 집에서 내가 불편하게 있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Q. 그렇다면 만약 본인이라면 큰어머니가 며느리들을 모두 데리고 탈출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유화상처럼 수동적으로 대처할 것 같은가?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스스로 판단했을 때 나는 수동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상황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을 것 같다. 허리 아픈 어머니에 관해 아버지에게 따끔하게 한마디하는 부분들은 나와 비슷하다.
Q. 감독이 되기 전에는 오랜 기간 투자 배급사에서 일했었다. ‘큰엄마의 미친봉고’를 작업하기까지 다양한 생각들을 해왔을 것 같다.
원래 배우 혹은 감독을 하고 싶어서였는데 아무도 안 시켜줬다.(웃음) 방송 3사는 낙방을 했고 이후 독립영화나 예술영화를 만드는 회사에 가고 싶었는데 정작 합격한 첫 회사는 대기업이었다. 투자 배급사 생활을 10년 정도 하고 나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이후 인생을 리셋했다. 첫 단편 영화 ‘대리 드라이버’를 찍었는데 ‘미쟝센 단편 영화제’ 경쟁부문인 희극지왕 섹션에 초청됐다. 남들이 재밌어하는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많았는데 다른 부문도 아닌 희극지왕 부문에 초청이 되어 기분이 좋았다.
Q. 이제는 감독이 되어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스스로 느끼기에 이 정도는 발전했다고 생각되는 점들, 반대로 아직은 부족한 점들이 눈에 들어온다면 무엇일까?
나이 서른일곱에 첫 단편 연출을 했다. 매우 늦게 시작한 편인데 아직까지 연출자로서 성취한 것들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래도 내 영화를 재밌어하는 정도만 확인을 한 것 같다. 예전에 김조광수 감독님의 칼럼을 본 적이 있다. 대학로 퀴어문화축제를 시작했을 때 처음에는 계란 세례도 받았는데 10년을 하니 사람들이 응원해줬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칼럼에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투자사 막내 직원으로 일한지 얼마 안 됐을 때였고 심적으로 힘들었는데 10년은 해보고 투덜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6년 겨울부터 했으니 이제 16년 정도 된 것 같다. 여전히 그만두지 않고 하고 있다는 점 하나 만큼은 스스로에게 칭찬을 해주고 싶다.
Q. 영화 업계에서 투자자로 있을 때와 감독의 입장으로 있을 때의 입장이 다를 것 같다. 그래도 이것 만큼은 감독이 되어 좋다는 점이 있다면 무엇일까?
영화에 미시적인 부분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다. 투자 담당이거나 프로듀서였을 때는 영화의 큰 방향성, 상업적 측면, 장르적인 부분에 대해서 감독이나 제작자, PD와 이야기를 나눴다면 지금은 매우 사소한 것들까지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내가 아몬드 코코넛을 마시고 있는데 극 중 인물이 아몬드 코코넛을 마실지 커피를 마실지 결정할 수 있는 재미가 크다.
Q. 연출에 있어서도 디테일을 살린 경우가 많을 것 같은데, 기억나는 작품 속 설정들이 궁금하다.
지금까지 연출한 작품에 나오는 술, 음식은 실제로 다 좋아하는 것들이다. 자세히 보면 같은 주종이어도 안 나오는 브랜드가 있다. 반대로 항상 나오는 주종 혹은 브랜드가 있다. 이번 영화에서는 많은 참여자들이 고생을 했는데 의상팀 없이 배우들 의상을 직접 마련했다. 의상과 미술에 대해 예민한 것 같다. 그런 지점들을 직접 만들어가는 것이 재밌다. TMI(Too Much Information)지만 동생이랑 한남동에서 바를 운영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벽에 어떤 포스터를 걸고, 어떤 벽지를 붙이고 어떤 음악을 틀고 술을 갖다 놓을지를 고민하는 과정이 영화 한 편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Q. 앞으로도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 중이다. 곧 개봉 예정인 ‘더블패티’, 그리고 현재 대본 작업 중인 ‘조국과 민족’도 있다.
‘큰엄마의 미친봉고’가 어른 세대가 중심이 된 이야기였다면 ‘더블패티’는 대한민국의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영화다. 신승호 배우, 배주연 배우가 출연한다. 내가 참 좋아하는 배우들이다. ‘조국과 민족’은 강태진 작가의 레진 코믹스 원작이고 훌륭하신 몇몇 기성 감독님들께서 연출 의향을 말씀주셨으나, 끝내 고사하고 직접 대본을 쓰고, 연출 준비를 하고 있다. 너무 좋은 선배 배우들이 함께 하자고 의기투합을 해주셨다.
Q. '큰엄마의 미친봉고'를 찾아줄 관객 여러분께 한마디 부탁드린다.
‘큰엄마의 미친봉고’는 남녀와 세대 간의 대립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아닌, 명절에 벌어질 수 있는 대한민국의 흔한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만든 작품이다. 편안하게 즐기고 보면서 끝나고 엄마한테 전화 한 통 넣을 수 있는 훈훈한 영화가 되길 바란다. (KBS미디어 정지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