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배우 최민식은 그 어떤 역할을 맡아도 짙은 인간의 페이소스를 스크린에 남긴다. 그런 최민식의 가장 최근의 변신은 국문과 교수이다. 샌님 같은 먹물, 소심한 지식인 같은 클리세를 뛰어넘어 지극히 문학적이라 할 인간상을 만들어낸다. 단 한 편의 소설, 그것도 데뷔소설만 세상에 내놓은 뒤, 더 이상 새로운 글은 써내지 못하고 국문과 교수로 학생들에게 창작수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의 친구는 문단에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가르치는 제자 하나는 빛나는 문학적 원고를 ‘계속’ 보여주고 있다. 열등감, 열패감, 좌절감에 시달리는 교수는 점점 원고지 속의 상상의 공간에 빠져들게 된다. 지난 달 26일 공개된 넷플릭스 6부작 드라마 <맨 끝줄 소년>에서 허문오 교수를 연기한 최민식을 만나 ‘지질함의 말로’에 대해 들어보았다.
“(‘파묘’이후) 작품으로 1년 만에 인터뷰를 하는 것이다. 여름에 공개된다고 해서 사실 놀랐다. <참교육>처럼 응징하는 드라마가 아니어서. 이야기가 답답하고 불편한 구석이 많다. 과연 이런 드라마를 좋아하실까. 이 작품에는 이야기의 힘이 있다. 사람들의 불편한 민낯을 보여준다. 굴절된 욕망에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부서지나. 이강(최현욱)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이강도 문제 많은 인간이다. 말과 글을 통한 폭력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 점들이 시사하는 바가 있다.”
Q. <올드보이>처럼 복수극이다.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었는지.
► 최민식: “<올드보이>는 생각을 못 했었다. 그냥 허문오라는 인물을 발가벗겨 정육점에 내걸린 고기처럼 만들고 싶었다. 일반적 상식에는 반하는 지식인이다. 작가라면서 배움의 시간과 관계없이 하나의 인격체로 완성되지 못한 인물이다. 그렇게 허문오라는 캐릭터를 해석했다. <올드보이>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다. 그 때는 세 치 혀를 잘못 놀려서 그 난리를 쳤는데 이번에도 잘못 처신해서 어린애에게 당하잖은가.”
'맨 끝줄 소년'
Q. 원작 희곡과 프랑스 영화는 보았는지.
► 최민식: “원작 희곡도 못 봤고, 오종 감독의 영화(‘인 더 하우스’)도 일부러 안 봤다. 이젠 봐야겠다. 미리 봤으면 연기하는데 영향을 받게 될 것이다. 원작과 영화는 문학적 색채가 더 강하고, 창작의 윤리문제와 관음적 소재에 더 초점이 맞춰졌다고 하더라. 이번 작품은 한국적 서스펜스와 인과에 대한 이야기가 더해져서 원작과 다를 것이다. 인간의 나약함과 욕망을 잘 담고 있다. 자기가 옛날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도 몰라서 파멸에 이르는 것이 각색의 포인트이다. 아마 예술의 문제, 창작윤리의 시선으로 시작했다면 여러모로 피곤해졌을 것이다. 총장님, 이게 대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서 김규태 감독을 총장님이라 불렀다. 총장님이 현실적으로 잘 각색한 것 같다. 대본을 한 번에 다 읽었다.”
Q. 이강을 연기한 최현욱과의 연기호흡은?
► 최민식: “너무 흡족하다. 나는 리시브만 잘하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이 친구의 연기를 잘 받아치면 무난하게 드라마가 굴려가겠구나. 이강이 깔아놓은 판에 내가 휘둘리는 것이니까. 최현욱은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감독의 디렉션을 잘 이해하고, 작품 해석력이 좋았다. 그걸 몸으로 정확하게 표현한다. 과감하게, 표현함에 주저함이 없더라. 준비를 많이 했다는 것이다. 내가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끝줄 소년'
Q. 일생의 맞수작가인 김수훈 작가를 연기한 허준호와의 연기 합은 어땠는지.
► 최민식: “두 사람 사이는 척하면 착이다. 군대후배이기도 하다. 20대 때 군에서 처음 만났으니. 참 짠한 감정이 든다. <천문>할 때 처음 같이 연기했다. 영화판이란 것이 오래 일하다보니 이런 역할로 또 만난다. 지금도 뭘 촬영하고 있다더라. 연기 준비는 딱히 할 게 없었다. 이젠 대충 리허설 하면서 쓰윽 보면 아니까. 얼마 전에 오래전 초등학교 동창을 많았었다. 바로 얼굴을 알아보겠더라. 뭐, 그런 느낌.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허준호와 김윤진은 마치 얼마 전에 만난 것처럼 익숙하다.”
Q. ‘맨 끝줄 소년’은 마지막 회, 6회의 이야기를 위해 달려가는 느낌이 든다. 앞부분 이야기를 어떻게 끌고 가려고 했는지.
► 최민식: “연기자의 자세는 확실하다. 주어진 음표에 맞게 정확하게 연주를 하면 된다. 불협화음이 안 나게. 당연히 매 회 빌드업 되는 텐션이 있다. 주어진 대본에서 새로 추가하거나, 설정을 집어넣은 것은 없다. 그런 작위적인 노력이 하나도 없었다. 이번만큼은 대본에 충실하려고 했다. 텍스트 자체가 원작에 비해서도 나무랄 때가 없었다. 원작을 각색한 부분이 명확했다.”
Q. 시험지 훔쳐서 캠퍼스를 뛰어가는 장면에 대해.
► 최민식: “뛰면서 죽는 줄 알았다. 계명대 캠퍼스에서 찍었는데 그날 진짜 더웠다. NG 내지 말자는 생각으로 죽어라하고 뛰었다. 완성된 작품에서 쓰인 것은 아마 두 번째 테이크일 것이다. 허문오가 가지고 있는 다면적인 면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많다. 찌질하기는 하지만 악한 놈은 아니다. 작가로서, 창작자로서 내실을 다지고 본지에 접근하려는 노력보다는 공명심이나, 라이벌 의식, 외형적 조건에 집착한다. 이런 열등감에 사로잡힌 허문오의 이야기를 6부작으로 끌고 가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블랙코미디 같은 변화를 주자고 한 것이다. 보면서 실소가 터져 나오는. 나약한 허문오가 이강에게 무너지는 모습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뒷이야기를 읽고 싶으니까.”
'맨 끝줄 소년'
Q.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디면.
► 최민식: “김수훈(허준호)이 하는 대사 중에 ‘쓸 이야기가 없을 때 안 쓰면 되잖아, 그렇게 살아도 되잖아.’라는 대사. 처음 대본 볼 때 섬뜩했다. 이 대본을 쓴 작가가 무서웠다. 그 대사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작가와의 대화 시간에 어설프게 공격했다가 그의 노련함에 떠 찌그러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신이 좋았다.”
Q. ‘첫사랑’ 은주 때문에 거의 이성이 마비되는 모습이다. 가능한 이야기인가?
► 최민식: “그럼요. 저의 경우는 아니지만 인생을 살면서 꽂히는 사람이 있다.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면 행복을 빌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김수훈의 아내인가. 옛날 감정이라기보다는 김수훈의 아내가 되었기에 그런 것이다.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질투다. 안은주는 내 여자라는 착각. 그런 확신을 해버리는 것이다. 그것도 다른 놈도 아닌 김수훈이 뺏어갔으니.”
Q. 진경이 연기한 아내는?
► 최민식: “사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부부관계는 복잡하다. 그럴 것 같으면 이혼하던가. 하지만 단순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중에 아내가 떠난다고 짐 싸니까 가지 말라고 한다. 그런 불편함이 있다. 허문오의 서사와 캐릭터를 그려나가는데 중요한 부분이다. 찌질한 인물이다. 그런 캐릭터를 보면 ‘너 이리 와 봐!’해서는 소주 한 잔 먹으면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다. 많은 사람이 혐오하는 그런 인물로 몇 개월 살다보니 안쓰럽고 연민이 간다. 나약하다. 그런데 심성이 그렇게까지 나쁜 놈은 아니다. 어디서부터 그렇게 되었을까. 나중에 안아주고 싶었다. 정신 차리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었다. 진경 배우는 차도녀인 줄 알았다. 깐깐하고 선생님같이 느껴졌다.”
Q.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는 이강과의 첫 만남. 그때 허문오가 내뱉는 말들의 진정성은?
► 최민식: “본심일 것이다. 그는 그냥 큰 죄의식 없이 그랬던 것이다. 이야깃거리를 찾으려고 한 것인데. ‘별 거 없어’란다. 그 대사 아직도 기억난다. ‘왜 주소를 가르쳐줘?’ 그건 그냥 지나가는 이야기였다. 훌륭한 작가가 되기 위한 발판을 삼으려고 하지만, 많이 결여된 인물이다.”
최민식
Q. 드라마를 보면 계속 허문오에게 ‘멈춰’라고 말하고 싶다. 그는 왜 멈추지 못하고 이강에게 집착할까.
► 최민식: “처음부터 이강의 문학적 소양이 정말 뛰어나다고 생각한 것이다. 서사를 쓰는 모양새가 학생이 썼다고 볼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간파한 것이다. 선생으로서 뭔가 가르쳐 준다는 것도 있지만 허 교수에게도 그걸 즐기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은밀하고 관음적인 글 자체에 끌려서 즐기고 싶은 마음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선생으로서의 양심은 있어서 ‘관찰을 하라 그랬지 언제 관음을 하라그랬냐’고 말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도덕성을 가지고 대화를 한다. 즐기더라도 너무 선 넘지 말라고 하는데, 상대가 김수훈이라는 걸 알고는 자제력을 잃고, 복수심과 질투와 그 열패감이 한꺼번에 뒤섞여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Q.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연기하고 싶은지.
► 최민식: “나이가 좀 있는, 인생을 산 사람의 용기 없는 중년의 사랑이야기.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같은 로맨스를 하고 싶다. 불륜이나 도덕적 측면의 접근보다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한 번 파고 들어가고 싶다. 그 영화 보면 그런 도덕적 딜레마를 느끼게 하는 장면이 있다. 또 하나는 우리나라 단편소설을 재해석 해보고 싶다. 고전을 재해석하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 될 것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우리식으로 옮긴다고 해보자. 뉴올리언즈의 블랑쉬 뒤브아는 동두천의 한 술집 이야기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한국적 설정에 맞게.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투자가 안 되겠죠?”
최민식, 최현욱, 허준호, 김윤진, 진경 등이 열연을 펼치는 김규태 감독의 넷플릭스 시리즈 <맨 끝줄 소년>은 지난 달 26일 공개되었다. 전체 6부작.
[사진=넷플릭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