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환상
이재명 대통령이 프랑스 에비앙에서 열리는 G7정상회의에 참석하는 길에 이탈리아를 들렀다. 올해가 이탈리아 공화국 선포 '80주년' 되는 해이다. '로마'의 이탈리아가 80년밖에 안 되었나? 이탈리아의 근대사를 엿볼 수 있는 영화가 지난 주 아주 극소수 영화관에서 조용히 개봉되었다. 로베르토 안도 감독의 <위대한 환상>(L'abbaglio,2025)이다. 영화는 1860년 이탈리아 땅에서 펼쳐졌던 장대한 통일전쟁의 이면을 다루고 있다.
우리가 구두(부츠) 같이 생긴 나라로 잘 알고 있는 이탈리아는 북쪽의 밀라노, 베네치아, 제노바,에서 피렌체, 로마, 나폴리와 함께 남쪽 시칠리아까지 익숙한 지명의 나라이다. 그 땅은 오랫동안 여러 민족, 여러 나라, 여러 왕국의 지배를 받아왔다. 유럽이 근대국가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하면서 그 바람은 이 땅에도 휘몰아쳤고 ‘이탈리아’가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투쟁(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이 시작된다. 바로 이 시절 이야기이다.
주세페 가리발디 장군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대장정에 나서고 그의 충성스러운 장교 오르시니 대령과 함께 코르토에서 ‘천인대’ 원정을 시작한다. 이탈리아 통일의 원대한 꿈을 위해 각양각색의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모병에 응한다. 농부도 있고, 아직 어린 아이도 있고, 사기꾼도 있고, 어중이떠중이도 있다. 그렇게 모인 천명의 의용군들은 ‘붉은 옷’을 입고 오르시니 대령과 함께 남쪽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남쪽 시칠리아. 배를 타고 상륙한다. 그들의 상대는 부르봉 왕조의 군대와 지역 유지들. 중과부적의 상황에서 가리발디는 기발한 계략을 세운다. 오르시니에게 소수의 병사를 주고는 적의 눈을 속이는 ‘미끼 전술’을 펼치는 것. 그 누구보다 먼저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싶었던 ‘오리시니와 소수의 병력’은 목숨을 걸고 발걸음을 돌린다.
위대한 환상
‘가리발디’의 이름은 혹시 들어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평균적인 사람이라면 ‘천인원정대’부터 낯설 것이다. 로베르토 안도 감독은 ‘천인원정대’의 거창한 레토릭에 숨겨진 당시의 상황을 때로는 건조하게, 때로는 코믹하게 담는다. 아벨 강스의 <나폴레옹>이 보여준 스펙터클한 전투신을 기대하지 말라. 그들은 쪽배에 몸을 싣고 시칠리아에 상륙하는 것부터 상상이하의 ‘역사적 전투신’을 재연한다. 용감한 군인과 함께 오합지졸의 탈영병까지 만나게 된다. ‘통일 이탈리아’라는 가리발디와 오르시니의 위대한 이상과 함께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올라탄 그 시절 ‘이탈리아 민초’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결국 소수의 희생으로 거대한 승리를 이끌게 되는 영광의 순간에 이른다. 하지만 그 뒷이야기는 씁쓸하다. 제목 ‘위대한 환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통일 이탈리아의 꿈이 ‘환상’이란 것인지. 영화 끝에 시칠리아 작전을 성공시킨 오르시니 대령의 모습이 보인다. 20년의 세월이 흐른 뒤 도박장에서 ‘문제적 사병’ 둘을 다시 만나게 된다. 그들은 여전히 사기꾼일 뿐이다. 대령은 “가엾은 이탈리아, 위대한 환상일 뿐.”이라고 한탄한다. 천인원정대가 통일을 앞당겼다는 것이, 소시민이 그 원동력이었다는 것이 환상이란 말인가. 아마도 통일된 이탈리아가 가난한 농민에게 사회정의와 평등을 안겨줄 것이라는 꿈이 무너지고 있는 것에 대한 한탄일 것이다. 프랑스 장 르누아르 감독의 클래식 <위대한 환상>(1937)과는 또 다른 의미인 셈. 원제 ‘L'abbaglio’는 ‘판단착오’, ‘큰 실수’, ‘착각’을 뜻한다.
위대한 환상
모든 나라가 지역적 특성이 있듯이 이탈리아도 북쪽과 남쪽의 지역성이 있다. 대체로 평가하기로는 북쪽은 산업화가 일찍 이뤄져서 부유하고, 남쪽(시칠리아)은 발전이 늦었다는 것. 게다가 이 동네는 <대부>이래 ‘마피아’ 이미지가 오래 남아있다. 한국에서 활동 중인 방송인 알레르토 몬디가 쓴 에세이 <이탈리아의 사생활>(과 그 증보판 <지극히 사적인 이탈리아>)을 보면 이탈리아의 지역색과 함께 지독한 지역적 언어 차이를 소개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언어적 차이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나온다.
여하튼, 오랜 세월 도시국가로 존재하던 이탈리아는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무솔리니를 거치며 하나로 뭉친다. 그리고 1946년 6월 2일, 국가제도 결정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이탈리아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그 80주년이다.
